조 상 이 야 기

원본파일 받기(hwp) 

 

 

  머리말

 15代祖 증조고 휘 진명(曾祖考 諱 鎭明)

  광주이씨(廣州李氏)의 본원(本源)

 16代祖 조고 휘 기전(祖考 諱 基琠)

  시조 휘 당(始祖 唐)

        종조 휘 기민(從祖 基玟)

  1代祖 둔촌공 휘 집(遁村公 諱 集)

        종조 휘 기무(從祖基珷)

  2代祖 청백리공 휘 지직(淸白吏公 諱 之直)

 17代   선고 휘 태회(先考 諱 太會)

  3代祖 충희공 휘 인손(忠僖公 諱 仁孫)

        숙부 휘 남회(叔父南會)

  4代祖 광원군 휘 극돈(廣原君 諱 克墩)

        숙부 휘 승회(叔父昇會)

  5代祖 감사공 휘 세정(監司公 諱 世貞)

        종숙 휘 양회(從叔暘會)

  6代祖 양진재공 휘 수관(養眞齋公 諱 秀莞)


부   록

  7代祖 사과공 휘 유창(司果公 諱 惟昌)

  8代祖 대흥공 휘 태남(大興公 諱 泰男)

  팔극조정(八克朝廷)의 유래(由來)

  9代祖 진사공 휘 민신(進士公 諱 敏臣)

  갑자사화(甲子士禍)

 10代祖 좌승지공 휘 중원(左承旨公 諱 重遠)

  대종회(大宗會)와 지파(支派)

 11代祖 휘 한봉(諱 漢封)

  광주이씨(廣州李氏)의 관직(官職) 현황(現況)

 12代祖 휘 이흥(諱 以興)

  동고(東皐)와 한음(漢陰)

 13代祖 사간공 휘 정박(司諫公 諱 廷璞)

  족보(族譜)에 관하여

 14代祖 고조고 휘 상휴(高祖考 諱 象休)

  진명파보(鎭明派譜)


 


머  리  말

 

  2009年부터 15대조인 鎭자明자 할아버지를 시제(時祭)로 모심에 즈음하여 장조카 근식(謹植)의 인터넷 사이트(leeks.kr) 개설은 시의적절한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이 사이트를 통해 우리 문중에 관한 여러 지식과 정보를 알 수 있고 자손간의 친목을 돈독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족보(진명파보)는 대소가의 친척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고 우리집안의 인명록을 통  해 주소지, 전화번호, 생년월일 등의 인적사항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었다 하겠다.

  아울러 홈페이지에 [우리의조상]이라는 게시판이 별도로 신설됨에 따라 그동안 우리 조상에 관한 글을 몇 회에 걸쳐서 올린바가 있는데 이것을 다시 정리하여 소책자로 발간하게 되었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는 누구이며 우리 이씨(李氏)가 어느 때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 그리고 윗대 조상들은 무슨 벼슬을 하고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직계조상(直系祖上)에 한하여 문헌과 족보를 통해 기술(記述)한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을 통해 접하지 못한 사람들도 널리 읽도록 하여 조금이나마 우리의 직계조상에 대해 이해를 하고 그 훌륭하신 조상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기를 바란다.

2012년 3월 31일

18代 孫 永培

 

1代祖 遁村先生 影幀
소재:경기도 성남시 하대원동 산7-1 추모재

 

 

 

 

광주이씨(廣州李氏)의 본원(本源)

  문헌에 의하면 광주이씨 시조는 신라 17대 내물왕(內勿王) 당시 내사령이란 벼슬을 지내신 자성공(自成公)이라고 한다.

  자성공은 경남 칠원서 세거(世居)한 호족의 후예로 신라조정에서 벼슬을 세습해왔으며. 신라가 패망해 고려 태조가 등극하자 자성공은 이에 불복하고 절의(節義)를 지키므로 벼슬을 빼앗기고 그 후손들은 회안(淮安), 지금이 경기도 광주 역리로 강등 당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광주이씨의 선조들은 고려의 이속(吏屬)으로 이어 왔으며 아전의 신분으로 과거도 볼 수 없어서 선대에 대한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결국 고려 3백60여 년간 조상에 대한 인물도 대수(代數)도 파악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 권세가의 도움으로 아전에서 향리(鄕吏)로 옮기게 되었고 사족들과도 교우를 하고 과거도 볼 수 있어 비로소 현달(顯達)의 문이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李 集(둔촌공) 선생의 아버지인 李唐(자)께서 국자감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 벼슬을 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를 했다.

  2자인 둔촌공은 대유학자로도 유명했다.

 

시조 휘 당(始祖 諱 唐)

  모든 성씨의 시조를 살펴보면 그 성씨를 크게 발흥시킨 큰 인물들이었다.

  광주이씨의 경우도 신라시대에 큰 벼슬을 지내신 자성공이라고 하지만 대대로 내려온 선대 조상의 기록이 없으므로 시조라고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광주이씨 시조는 고려 말 국자감 생원 벼슬을 하신 휘 당(唐)이시다.

  당(자) 할아버지를 시조로 한 것은 그 분 이하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고 줄줄이 대과에 급제하여 정승 판서 등의 인물들이 많이 배출돼 명문(名門)으로 번창하였기 때문이다.

  시조 휘 당(唐)은 고려 공민왕 때 국자감 생원이었는데 조선조에 와서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이는 상기한 바와 같이 아들 5형제가 과거에 급제했고 둘째아들 둔촌공이 대학자로 명성이 높았을 뿐 아니라 그의 세 아들과 여러 손자 증손자 등이 조선조에서 정승 판서 등의 고위 관직을 역임했기에 그 공으로 증직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광주목편에 이당에 관한 글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당은 본(本) 주(州)의 관리이다.

  공손(恭遜)하고 행동을 삼갔으며 현행(賢行)이 있었다. 다섯 아들이 모두 등과(登科)하였는데, 둔촌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시조 묘소는 경북 영천군 북안면 도유동에 있다.

  둘째 아들 둔촌공이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 요승 신돈의 화를 피하기 위해 아버지를 업고 야간을 이용하여 영천에 사는 친구 최원도(사간) 집으로 갔었다.

  거기서 숨어 지내다가 다음해(1369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최사간 모친 묘 아래에 안장했던 것이다.

  둔촌공이 평소 강직해서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했기에 장차 화를 예상해 머나먼 경상도 영천 친구 집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최사간 은 둔촌공과 과거(科擧) 동문으로 절친한 사이인데 역시 신돈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에 내려가 우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광주이씨 후손들은 매년 10월 시조(始祖) 시사(時祀) 참례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 백명이 경북 영천 도유동 시조산소를 찾곤 한다.

 

시조 당(唐) 할아버지에 관한 일화(逸話)

  시조 당(唐) 할아버지에 관해 내려온 일화가 있어 요약해서 소개한다.

  휘 당께서 광주 아전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따뜻한 봄날 광주 태수가 낮잠을 자려 하고 있는데 뜰 평상 옆에 있는 나무를 황룡이 휘감고 승천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태수가 일어나 보니 꿈이었다.

  기이하게 여긴 나머지 하인을 시켜 그 뜰에 가보라 했는데 한 청년이 평상에서 나무에 기대어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청년이 우리 당자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태수는 길몽으로 여기고 그 청년과 삼고(三苦;말을 못 하고, 못 듣고, 행동이 부자유)에 있는 자기 딸과 결혼을 시켰다.

  그 결혼으로 인하여 기적이 일어났다.
  신부가 말문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행동이 자유로운 정상인이 되었다.

  그 후 그 청년은 태수의 사위로서 향리로 신분이 격상되고 열심히 공부를 하여 대과에 급제를 하고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를 했다.


 

 

1代祖 둔촌공 휘 집(遁村公 諱 集)
1327~1387년(고려충숙왕14~우왕13년);61세

  휘 집(集) 둔촌공은 시조 휘 당(唐) 생원공의 둘째 아들로서 제 1대조이지만 광주이씨의 시조로 여기기도 한다.

  그 분이 너무도 훌륭한 명현(名賢)일 뿐 아니라 그 후손이 크게 번창했기 때문이다.

  공의 자는 호연(浩然)이고 호는 둔촌(遁村)이시다.

  고려 충숙왕 14년(1327)에 지금의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서 탄생하시고 충목왕 3년(1347)에 진사시에, 공민왕 4년에 문과에 급제하셨고 정 3품 봉순대부 판전교시사(비서실장급)에 이르셨다.

  해박한 학문과 고상한 지절(志節)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과 같은 여러 명현(名賢)들과 더불어 시문을 나누고 도의로 교우하시는 등 절의와 문장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셨다.

  당시 요승(妖僧) 신돈이 갖은 전횡으로 세상이 혼란해지자 성품이 강직하신 공이 많은 사람 앞에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셨다.

  이에 신돈의 귀에 들어가 악감으로 공을 잡아 죽이려고 하니 우선 둔촌동의 일자산 토굴로 피하여 숨었는데 발각될 위험에 놓이자 공은 노부(老父)를 업고 경상도 영천 친구인 최원도 집에 가서 은거했던 것이다.

  1년이 지난 다음해에 부친의 상을 당해(43세 때) 그곳에서 장례를 치렀고 1371년에 신돈이 역모로 주살됨으로써 4년간의 피신생활을 끝냈던 것이다.

  공은 한 많은 피난 생활을 마치고 옛 집으로 돌아오시고 나서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초명(初名)인 원령(元齡)을 집(集)으로, 자(字) 성로(成老)를 호연(浩然)으로, 호(號) 묵암자(墨巖子)를 둔촌(遁村)으로 각각 고치셨다.

  공은 그 후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강동구 둔촌동과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내려와 계시다가 여주 천령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로 이사하여 손수 농사를 지으시고 독서로 세월을 보내며 삼은(三隱)인 정몽주 이숭인 길재 등과 시문(詩文)을 주고받으며 지내시다가 생을 마치시니 향년 61세이시다.

  둔촌공이 서거한지 6년 뒤인 1392년에 조선조가 건국되고 아들에 이어 후손들이 크게 현달하여 조선조에서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셨다.

  문학 작품으론 시문 2백94편의 시고 둔촌잡영(詩稿 遁村雜詠) 상하 2권이 있는데 보물 1218호로 지정돼 있다.

  묘소는 성남시 하대원동 산 7-1이며 오래되고 마모되어 1653년에 묘갈석을 개수했고 묘역은 1995년 8월 2일 성남시 향토유적 제 2호로 지정됐다.

  배위는 증정경부인 영주(州) 황씨이며 3남 1녀를 두셨다. 장자의 휘는 지직(之直)이며 청백리(淸白吏)로 선록되셨고, 차자의 휘는 지강(之剛)이시며 좌참찬의 문숙공(文肅公)이시고 3자의 휘는 지유(之柔)이시며 성주 목사공(牧使公)이시다.

  공의 인품을 조감해 볼 때 첫째 유학자로서 학문에 정진했고 충(忠),효(孝),신(信).의(義)의 표상으로 칭송되고 있다.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는데. 둔촌공의 정훈시(庭訓詩) 2편중 한편을 소개하면,

  遺子滿金 자손에게 금을 광주리 가득 준다 해도

  不如敎一經 경서 한권 가르치는 것만 못 하느니라

  此言雖淡薄 이 말이 비록 담박하지만

  爲爾告丁寧 너희들을 위해서 간곡히 일러둔다. 이다. .

  이 시는 공이 신돈의 화를 피해 경상도로 피난 갔을 때 부친과 부인, 세 아들(지직, 지강, 지유)과 같이 가다가 부인과 세 아들은 중간에 불국사로 갔는데 그때 세 아들에게 준 권학시(勸學詩)라고 한다.

  다음으로 공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정의(正義)감이 투철하셨다.

  역승 신돈의 전횡에 서슴없이 비판을 가하는 것을 보더라도 강직한 성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공은 효성이 지극한 효자였었다.

  젊은 시절 부친이 원인 모를 커다란 종기가 등에 나서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낫게 한 일화(逸話)가 있다.

  그 일화에 의하면 공이 부친 병 간호에 골몰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신선이 나타나 ‘애야 내일부터 목욕재계하고 국청사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려라. 그러면 부친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하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후 공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심히 기도를 드린 것이 어느덧 백일이 거의 끝나는 무렵이었다.

  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공이 어느 바위틈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그 속에 금붕어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하도 신기해서 금붕어를 소중히 잡아 집에서 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밤 부친이 목이 하도 말라서 금붕어가 들어 있는 그릇의 물을 마셔버렸는데 등에 난 종기가 확 터지면서 피고름이 쏟아지고 시원해진 것이다.

  부친이 깨워 일어난 공은 등에 흐르는 고름을 닦고 물을 다시 그 그릇에 넣으니 이상하게도 금붕어가 검어지는 것이었다.

  날이 샌 후 샘물을 떠와 그릇에 넣으니 신기하게도 붕어의 빛이 황금색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물론 부친의 병은 완치되었다.

  그 이후 이 약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 각처에서 피부병 환자가 몰려 왔고 이 샘물의 근처에 국청사라는 절이 있었기에 국청사 우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둔촌공의 유덕 추모 행사

  조선조 현종 때(1669년) 여러 사림(士林)들이 공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 암사강상변(현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산1~1)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을 세워 제향을 모시어 왔었는데 숙종 때(1697년)에 구암서원이라는 액자(額字)가 하사(下賜)되었다.

  서울시 강동구엔 둔촌동이 있는데 그곳에서(당시엔 광주군) 둔촌공이 기거한 바 있었기에 따온 이름이다.

  일자산 정상의 정훈비(庭訓碑)와 둔굴 등 공의 유적지를 강동구에서  성역화하여 관리하고 있다.

  또한 성남시에서는 매년 5월에 둔촌 선조님의 유덕을 기리는 각종 행사를 펼치고 있다.

  매년 5월 둘째 주를 둔촌 주간으로 정해 공의 효행과 충절심을 기리는 둔촌백일장(청소년 문학상.한시 백일장)을 개최하고 마지막 날엔 광주이씨 대종회와 공동으로 둔촌 생신제를 성대히 거행하고 있다.

 

 1代祖 둔촌공의 형제들

  둔촌공의 다섯 형제 중 첫째형은 휘 인령(仁齡)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경선고사(慶先庫使)에 오르셨다. 아드님 조(遭)가 있어 문과에 급제했으나 후손의 존재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셋째동생은 휘 희령(希齡)이고 십거과(十擧科)에 급제하시어 지군사(知郡事=군수)에 이르셨으나 아들이 없어 무후이시다.

  넷째동생은 휘 자령(自齡)이고 십운과(진사)에 급제 참의(정3품)에 오르셨다.
  장자 연동(蓮仝)은 장악원정(정3품)에, 손자 봉로(逢老)는 증이조판서이며 증손 두신(斗信)은 조선조 태종 때 자헌대부 공조판서이신데 병자 문신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장흥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복권되셨다.

  시호는 충민(忠愍)이시다.

  그 후손은 단출했고 특히 1919년 3.1 독립선언 33인 대표의 한분인 종훈 선생이 민충공의 21대손이시다. 대종회 십운과공 지파로 이어오고 있다.

  다섯째동생은 휘 천령(天齡)이고 보현과에 급제했으나 후사가 없다.

  공의 5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했으나 둔촌공과 넷째인 십운과공만이 후손이 있을 뿐이다.

 

2代祖 청백리공 휘 지직(淸白吏公 諱 之直)
1354~1419년(공민왕3~조선세종1년);66세

  2대조이신 휘 지직(之直)의 자는 백평(伯平)이시고 호는 탄천(炭川)이시다.

  고려 공민왕 3년(1354년)에 둔촌공 장자로 탄생하셨고, 포은 정몽주(鄭夢周)선생 문하에서 동생들과 함께 수학하셨다.

  아버지 둔촌공의 유지를 받들어 학문이 고명하시고 처사가 강정(剛正)하셨다.

  우왕 6년(1380년)에 문과에 아원(亞元) 급제하시어 한림에 들었고 경승부 소윤을 거쳐 평창. 청주. 충주 목사를 지내셨다.

  조선조에 들어서 관동과 호서의 관찰사(도지사)를 지내셨고 형조참의 보문각 직제학(정3품)에 계실 때 정종 2년 소도(昭悼;방석)의 변란을 당해서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방원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하는 절의(節義)를 보이셨다.

  이 일로 금고의 처벌을 받고 조정에서 물러나 광주 탄천의 사저에서 사셨는데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탄천선생이라고 높이 우러러 모시었다.

  태종 이방원이 세종에게 이지직은 충직(忠直)한 신하이니 다시 불러 등용하라고 당부를 해 세종이 등극한 후 형조 우참의로 임명하여 부르셨으나 부임을 못하고 서거(세종 1년 1419년)하시니 향년 66세이시다.

  뒤에 청백리(청렴결백한 관리)로 선정되었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하대원동 산 311 둔촌공 묘소 서편에 계시며 배위는 증정경부인 경주이씨이신데 묘소는 공의 묘소 위쪽에 있다.

  슬하에 3남 4녀를 두셨는데 아들로는 장자 장손(長孫;사인공), 차자 인손(仁孫;충희공), 3자 예손(禮孫;관찰사공)이시다.

 

 2대조 청백리공의 형제들

  청백리공의 첫째 동생 휘 지강(之剛)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 둔촌공의 둘째 아들로 탄생하시니 자는 중잠(仲潛)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시다.

  포은 정몽주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셨고 고려조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시어 의정부 사인(舍人), 사헌부 장령(정4품)을 지내셨다.

  조선조 태종 7년 45세에 왕이 친림하여 치른 문신 중시에 급제하시어 예문관 직제학, 호조참판(차관) 겸 세자좌부빈객으로 계셨으며 세자인 세종을 잘 훈도하여 후일 성군이 되는데 큰 역할을 하셨다.
  호조판서를 3차, 예조판서를 2차례나 역임하셨다.

  세종 6년에 의정부 좌참찬 겸 대사헌(감사원장급)에 오르시고 세종 9년(1427년)에 향년 65세로 서거하셨다.

  세 아들을 두셨는데 장자는 맹손(孟孫), 2자는 예손(睿孫), 3자는 성손(聖孫)이며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묘소는 경북 울진군 평해면 학곡리 산 67-1에 합폄이다.

  둘째 동생은 휘 지유(之柔)이며 자는 숙명(叔明)이시다.

  역시 포은 정몽주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하셨고 고려 공민왕 1년(1389년)에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셨다.

  조선조에 들어 사간으로 발탁되셨고 재직 중 소도의 변란을 당해 방원에게 극간하다가 성주 목사로 좌천되셨다.

  그 후로 왕실의 형제간 살육전을 통탄하시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뜨셨다.

  배위는 함양박씨이며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항동에 있으며 합폄이다.

  네 아들을 두셨는데 장자는 일원(一元), 2자는 중원(中元), 3자는 정원(貞元), 4자는 계원(季元)이다.

 

3代祖 충희공 휘 인손(忠僖公 諱 仁孫)
1395~1463년(태조4~세조9년);69세

  3대조이신 충희공은 휘 지직(之直)의 둘째 아들로서 자는 중윤(仲胤)이시고 호는 풍애(楓崖)이시다.

  조선조 태조 4년(1395년) 7월 4일에 탄생하셨다.

  공은 22세에 문과에 급제(태종 15년 1417년)하셨고 예조참의, 경상도관찰사 겸 상주목사, 대사헌에 오르셨다.

  언사가 절직(切直)하여 중신들의 미움을 받아 한성 부윤으로 좌천됐다가 다시 형조참판을 거쳐 호조판서로 승진되셨다.

  세조 1년(1455년) 판중추부사 겸 호조판서에 오르셨고 호남에 기근이 심해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백성 구제에 힘쓰셨다.

  그 이후 의정부좌찬성으로 승진되셨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과 세자 사부(師傅)를 겸하고 계시다가 치사(致仕)하셨다.

  공은 평소 성품이 침착하고 강직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항상 전례(典禮)와 고사를 꾸준히 연구 숙독함으로써 세인의 추앙을 받으셨다.

  세조 9년(1463년) 7월 13일 향년 69세로 서거하시니 의정부 영의정으로 증직되고 충희(忠僖)의 시호를 받으셨다.

  배위는 정경부인 교하노씨이시며 다섯 아들을 모두 대과에 급제시켰다하여 조정으로부터 매년 20석의 쌀을 포상받았다.

  세조 3년(1465년) 향년 69세로 서거하시니, 부군과 합폄하였다.

  공의 처음 묘소는 여주 영릉(현 세종대왕릉) 자리였으나 예종 1년(1469년)에 현 여주군 능서면 신지리 산 55-5로 천장하였다.

  광릉 산천의 영기와 선조의 큰 음덕으로 공의 아들 5형제가 무두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현달해 군(君)호를 받았는데

장자는 휘 극배(克培) 의정부 영의정 광릉부원군,

차자는 휘 극감(克堪) 형조판서 문경공 광성군,

3자는 휘 극증(克增) 판중추부사 공장공 광천부원군,

4자는 휘 극돈(克墩) 의정부 좌찬성 익평공 광원군,

5자는 휘 극균(克均) 의정부 좌의정 광남군이다.

 

4代祖 광원군 휘 극돈(廣原君 諱 克墩)
1435~1503년(세종17~연산9년);69세

  4대조이신 광원군은 세종 17년(1435년)에 휘 인손(仁孫)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시고 자는 사고(士高)이시며 호는 사봉(四峰)이시다.

  공은 용모가 수려하고 성품이 강직하셨다.

  공은 세조 3년(1457년) 23세에 문과에 급제,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이조.예조좌랑, 동부승지, 병조참의, 예문관제학을 거쳐 평안도.전라도 관찰사, 이조.호조판서에 오르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세자우빈객으로 승진하셨다.

  공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시무십이조(時務十二條)를 상소하여 교육제도를 정립하고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신편동국통감(新編東國通鑑)을 편찬, 그 서문을 지으셨으며 노사신(盧思愼) 등과 강목신증(綱目新增)을 저작하셨다.

  공이 연산 무오년 윤효손(尹孝孫) 등과 함께 수사관(修史官)으로 계실 때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것을 발견, 상게(上揭)하려던 차에 유자광(柳子光)이 그 사실을 먼저 알고 상게를 해버린 것이다.

  이에 공은 수사관(修史官) 당상으로서 즉시 상게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파직을 당해 북청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호남으로 이배(移配)되어 4년여간 고초를 겪으셨다.

  그 후 사면되시고 은거자적(隱居自適)하시며 지내시다가 연산 9년(1503년) 서거하시니 향년 69세이시다.

  조의제문으로 인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촉발하여 김종직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김일손 등 사림파 선비들이 크게 참화를 당했는데 일부 야사에서 유자광과 공이 같이 상게하였다고 하여 욕을 먹고 있지만 잘 못 알려진 사실이다.

  공은 중종반정 후 3자인 휘 세정(世貞)께서 상소를 올려 사면 복권되시고 시호를 익평(翼平)으로 받으셨으며 세사부조(世祀不祧 ;사당에 영구히 제사 드림)되셨다.

  묘소는 성남시 하대원동 조부 청백리공 묘소 우편에 있고 사당은 수원시 파장동에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안동권씨이고 묘소는 부군과 쌍분이다.

  묘비가 너무 오래돼 1985년 새로 세웠는데 15대손 정래(晶來)가 찬하고 14대손 영휘(永輝)가 썼다.

  공의 아들이 8남인데 세전(世銓), 세경(世卿), 세정(世貞), 세륜(世綸), 세응(世應), 세규(世規), 세진(世珍), 세희(世熙)시다.

 

5代祖 감사공 휘 세정(監司公 諱 世貞)
1461~1530년(세조7~중종26년);69세

  5대조이신 감사공은 광원군(廣原君)의 삼자(三子)이며 자는 중권(仲權)이고 世祖 7년(1461년) 5월 21일에 탄생하셨다.

  성종(成宗) 21년에 음사(蔭仕)로 와서(瓦署) 별제(別提)를 거쳐 연산군(燕山君) 2년(1496년) 내사시 주부(主簿),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 충훈부(忠勳府) 경력(經歷)을 지냈고 연산군 7년(150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뽑혔으며 사헌부 장령(掌令), 군기시 첨정(僉正), 승문원 참교(參校), 세자 시강원(侍講院) 보덕(輔德)을 거쳐 연산군 9년에 통정대부 병조참의에 오르셨다..

  공은 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를 당해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중종(中宗) 1년에 귀양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오셨다.

  공은 바로 예조 병조 참의를 제수 받았으며 그 후 광주(光州) 목사와 병조 예조 형조참의, 전주 부윤(府尹), 해주 목사(牧使)를 거쳐 돈영부 도정(都正) 판결사(判決事)에 이르셨다.

  공은 중종 15년(1520년)에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시다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중종 19년에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와 이어 도승지(都承旨)로 승진되셨다.

  이듬해에 예조 병조 형조 등 5조 참의를 지내시던 중 모친상을 당해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위독한 상태에서 자손들에게 “내가 이미 모친 장례를 모셨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다만 앞으로 제사에 유과를 쓰지 말 것(그때의 유언이 오늘날까지 지켜져 제사에 유과를 쓰지 않고 있음)이며 초상(初喪)에도 채색 비단을 쓰지 말고 범사에 간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하시니 향년 69세였다.

  경기도 성남시 하대원동 선영의 옆에 안장했다.

  공의 성품은 강직하고 검소하여 관직에 있을 때는 항상 근신하고 정직했으며 부모에 효도를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셨다.

  배위는 정경부인 전주이씨며 종실(宗室) 예천군 천(篟)의 따님이고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증손녀이다.

  중종 27년(1532년)에 별세하시니 향년 71세이며 묘는 합장이다.

  공은 아들 5형제를 두셨는데,
  장자 수진(秀蓁) 재령군수 증좌승지(左承旨)
  2자 수령(秀笭)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
  3자 수화(秀華) 율봉찰방(栗峰察訪)
  4자 수봉(秀篈) 영(令)
  5자 수관(秀莞) 내섬시판관(內贍寺判官)이다.

 

6代祖 양진재공 휘 수관(養眞齋公 諱 秀莞)
1500~1573년(연산6~선조5년);73세

  6대조이신 양진재공(秀莞)의 행적을 기술함에 앞서 몇 마디 중요성을 피력하고자 한다.

  공(公)의 이전까지의 우리 선조들(1대조 ~ 5대조)은 당시 한양(漢陽;廣州)을 근거로 하여 세거해 왔지만 공이 남하(南下)하시어 입보성(入寶城)한 이후부터 지금(3백50여년)까지는 보성을 중심으로 여러 마을에서 우리 일가가 모여 살아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양진재공은 보성광이(寶城廣李)의 중시조(中始祖)가 되는 셈이다..

  공은 5대조이신 감사공 휘 세정(世貞)의 5자이며 자(字)는 군서(君瑞)이고 호(號)는 양진재(養眞齋)이다. 연산군 6년(1500년)에 탄생하셨다

  공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공(公)께서는 31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곡성 임실 구례 장성 등의 현감(縣監)을 역임하셨으며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치적을 남기셨다.

  그 후 내섬시판관(內贍寺判官)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 두셨지만 유학(儒學)과 학문(學問)이 높아 당시 유학의 대가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선생 등과 예법(禮法)과 학문(學問)에 관해 논(論)하기도 했다.

  특히 장성(長城) 현감 재직 시에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선생과 더불어 도의(道義) 교우(交友)를 두터이 하셨다.

  이로 미루어 공의 인품과 학문이 얼마나 높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런 훌륭하신 양진재공의 공덕이 우리 보성 광이의 명성과 번창을 가져오게 하지 않았나 싶다.

  공은 벼슬을 그만 두시고 율곡(栗谷),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선생,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선생 등 명현(名賢)들과 같이 정자(亭子)를 호서(湖西)에 짓고 도학과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하셨다고 한다.

  만년에 부귀를 멀리하고 홀연히 남하(南下)하여 보성의 대곡(大谷)에 자리를 잡고 일거(逸居)하셨는데 앞쪽에는 푸른 바다가 보이고 뒤쪽에는 골짜기 맑은 물이 흐르는 승경(勝景) 속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어 호(號)를 스스로 양진재(養眞齋)라 하고 집의 북쪽에 매월당(梅月堂)을 지어 시(詩)와 경서(經書)를 벗 삼아 여생을 한가로이 보내셨다.

  공이 무슨 연유로 입보성(入寶城)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인 감사공(世貞)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따라와 살다가 보성(寶城)에 남아 정착했거나 어머니가 종친인 전주이씨로서 보성 한실(大谷)에서 사는 친정의 일가와의 아들 혼사를 성사시켜 이로 인해 처가인 보성 한실에서 정착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해동록(海東錄)에 의하면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이 친구에게 보내는 서찰에서 말하기를 “거년(去年)에 율곡옹(栗谷翁)이 서(西)쪽으로 돌아가고 금년엔 이수관(李秀莞)이 남하(南下)할 뜻을 갖고 있으니 나의 도(道)가 외롭구나”.라고 했다한다.

  공은 항상 유학(儒學)에 게으르지 않으면서 자손들에게는 학문을 가르치고 예로써 훈계(訓戒)하셨다.

  성품이 사치를 멀리하고 선조(先祖)들의 가르침을 좇아 가법(家法)을 세우기도 했다.

  당대의 명현(名賢)인 이눌헌(李訥軒), 사균(思勻, 양학포(梁學圃), 팽손(彭孫), 박눌재상(朴訥齋詳), 안둔암(安鈍庵) 등과 의리(義理)가 상통(相通)하여 종유(從遊)하였었다.

  공은 선조(宣祖) 5년(1573년)에 별세하시니 향년 73세이다.

  배위(配位)는 전주이씨이며 종실(宗室) 임성부수(任城副守) 언정(彦廷)의 따님이다.

  묘소는 보성군 겸백면 수남리 을좌원이며 합장이다.

  공은 3자를 두셨는데,
장자 유형(惟亨)
2자 유창(惟昌) 부사과(副司果)
3자 유번(惟蕃) 증형조참의(贈刑曹參議)이다.

  보성 우리 일가에서는 양진재공의 3자(子) 후손들이 종파(惟亨)와 중파(惟昌) 그리고 계파(惟蕃)로 나눠 말하기도 한다.

  종파는 대곡(한실), 중파는 당촌 시래, 계파는 예동 강골 등지에서 자작일촌을 이뤄 살고 있다.

  통계에 의해 확실한 근거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3파중에 종파 후손이 조금은 적은 편이고 중파와 계파 후손은 거의 비슷하지 않나 싶다.

  관직(官職) 면에서 살펴 볼 때 학문과 인품이 고명(高名)하신 1대조 둔촌공, 2대조 청백리공, 3대조 충희공(우의정), 4대조 광원군(좌찬성), 5대조 감사공까지 웃대 선조들은 연달아 고위 관직을 역임하셨지만 6대조인 양진재공 이후로는 중앙 관직에 진출하여 크게 되신 분은 없었다.

  이는 운세(運勢)가 쇠퇴하기 보다는 중앙 조정과는 동떨어진 시골(지방)에서 살다보니 조정에 진출하기에는 역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13대조이신 사간공(廷璞)이 영조(英祖) 때 대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갔으나 고위직에 오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현대(대한민국)에 와서는 양진재공 후손으로서 국회의원(晶來;종파, 重載.敬載.鐘九;계파)과 대법원장(大法院長;容勳;중파) 판.검사 등 고위직 인사들이 많이 배출돼 보성 광이의 자부심을 안겨주고 있다하겠다.

 

7代祖 이하 행적 기술(記述)에 앞서

  그동안 “우리의 조상” 제하(題下)에 ‘광주이씨의 본원’으로부터 시작하여 6대조이신 양진재(養眞齋)공까지 그 행적(行蹟)에 관해 기술(記述)했다.

  물론 중간에‘8克朝廷’‘甲子士禍’ 등등 우리 조상과 연관된 사항에 대해서도 몇 회에 걸쳐 살펴본 바 있다.

  현재 6대조인 양진재공까지 기술했으니 앞으로는 7대조 이하 16대조에 이어 17대조이신 휘 태회(太會;先考)까지 써 볼 예정으로 있다.

  다만 참고할 것은 시조(始祖)로부터 6대조(양진재공)까지는 벼슬을 하여 대체로 고위 관직을 역임했기에 족보상으로나 기타 문헌에 각자 행적에 관한 기록이 잘 되어 있지만 7대조 이하 16대조(휘 基琠)까지는 몇몇 조상을 제외하고는 벼슬을 하지 못한 연유로 기록이 미진하고 부실한 실정이다.

  겨우 조상의 자(字)와 호(號), 출생과 사망연대, 배위(配位)에 관한 사항과 묘소 소재지(所在地) 등 아주 간단한 기록만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조 휘 당(唐)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5백여년 동안 자손(子孫)이 연면(連綿)히 이어 내려와 오늘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상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비록 조상 중에는 벼슬을 안 한 분이 있을지라도 학문을 하셨고 훌륭한 인품을 지녔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 족보상의 기록을 근거로 직계 조상과 그 형제들까지의 행적을 내 나름 대로 기술할까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대대로 내려온 조상의 묘소들이 엄연히 존재해 있고 또 매년 10월에 시사를 모시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조상과 현재의 우리와 후손으로 이어지는 윤리적 당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직계 할아버지의 시사에 모두 참여해야 하겠고. 생업에 바빠 참례는 못할지라도 본 기록을 참고하여 15대에 이르는 조상의 산소가 어디에 소재하고 있다는 것쯤은 파악하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상의 소목도는 양진재공이 입보성(入寶城)하여 터전을 잡고 세 아들과 그 밑에 열하나의 손자, 스물하나의 증손(曾孫)을 두었는데 참고로 각기 그 휘(諱)를 명기한 것이다.

 

7代祖 사과공 휘 유창(司果公 諱 惟昌)
1541~1582년(중종36~선조15년);41세

  7代祖이신 사과공(司果公) 휘(諱) 유창(惟昌)은 양진재공(養眞齋公)의 2자이며 자(字)는 창중(昌仲)이다.

  중종(中宗) 36년(1541년)에 탄생하여 선조 15년(1582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41세였다.

  공은 천성이 청검(淸儉)하고 효우(孝友)가 돈독했으며 영귀(榮貴)를 탐탁치 아니하였다.

  음사(蔭仕)로서 충의위(忠義衛), 창신교위(彰信校尉), 부사과(副司果)에 이르셨다

  묘소는 보성군 겸백면 자포실 손좌(巽坐)이다. 배위(配位)는 죽산안씨이며 합장이다.

  공은 5자를 두었는데 윤남(允男).신남(信男),의남(義男),기남(奇男),태남(泰男)이다.

  사과(司果)공의 백씨(伯氏)인 휘 유형(惟亨)의 자는 형중(亨仲)이고 중종 24년(1529년)에 탄생하셨다.

  공(惟亨)은 장남으로서 양진재공이 벼슬을 사임하고 남하(南下)한 뜻을 받들어 사진(仕進)에 뜻을 두지 않고 조용히 일거(逸居)하셨는데 선조 30년(1597년) 정유왜란(丁酉倭亂)이 일어나자 아들(慶男)의 등에 엎여 산속으로 피란 가던 중 왜적을 만나 부자(父子)분이 불행하게도 참변(慘變)을 당했다.

  그때 공의 나이 68세이고 아들(慶男)은 44세였다.

  난(亂)이 끝난 후 조정에선 충효의 표상으로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 앞에 정려(旌閭)를 세워주었다.

  묘소는 고흥군 포두면 송산리에 있고 배위는 상주김씨로서 합장이다.

  사과(司果)공의 계씨(季氏)인 휘 유번(惟蕃)은 자가 번중(蕃仲)이며 인종 원년 (1545년)에 탄생하여 선조 5년(1572년)에 별세하니 향년 28세였다.

  공(惟蕃)의 4자인 현남(顯男)이 정유재란 때 형 응남(應男)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을 무찔렀는데 그 훈무(勳武)로서 등과(登科)하여 남해 현령과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의에 올랐다.

  그 공(功)으로 부친인 공이 형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죽산안씨이며 합장이다.

  묘소는 겸백면 수남리 양진재공(先考) 묘 오른쪽 묘좌에 있다.

 

8代祖 대흥공 휘 태남(大興公 諱 泰男)
1568~1633년(선조1년~인조11년);65세

  8代祖이신 대흥공(大興公) 휘(諱) 태남(泰男)은 휘 유창(惟昌)의 5자이며 자(字)는 순경(順卿)이다.

  선조 1년(1568년)에 탄생하셨다.

  공은 일찍이 학문에 재주가 있었고 임진왜란 때엔 종형(慶男;監正公) 등과 더불어 창의(倡義)에 종군하여 무주.금산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통훈대부에 올라 대흥현감(大興縣監)에 제수되었다.

  광해군(光海君) 조정(朝廷)에 들어 군주의 패륜과 간신들의 창광(猖狂)함을 통탄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자제(子弟) 훈육에 낙을 삼고 여생을 보내던 중 인조(仁祖) 11년(1633년)에 별세하니 향년 65세였다.

  묘소는 보성군 복내면 시천리 해좌(亥坐)에 있다.


전남 보성군 복내면 시천리 광주이씨 제각(祭閣)
 


8대조 대흥공(휘 泰男)의 묘소<전남 보성군 복내면 시천리>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문화 유씨이며 합장이다.

  공은 3자를 두었는데 득신(得臣) 준신(儁臣) 민신(敏臣)이다.

  큰형인 휘 윤남(允男)의 자(字)는 성경(誠卿)이다.
  명종 15년(1560년)에 출생하여 선조 25년(1597년)에 별세하니 향년 37세이다.
  묘소는 보성군 겸백면 석호리 자포실 선고(惟昌) 묘 오른쪽에 있다.
  양신(亮臣) 필신(弼臣) 등 두 아들을 두었다.

  둘째형인 신남(信男)은 후사가 없어 행적이 미상(未詳)하므로 생략(省略)했다.

  셋째형인 휘 의남(義男)의 자(字)는 의경(宜卿)이다.
  명종 20년(1565년)에 출생했다.
  별세 연대는 미상이다.
  묘소는 구례 모가치(毛加峙) 임좌(壬坐)이며 배위는 영광유씨(靈光柳氏)이고 묘는 부군과 합장이다.
  진신(晉臣) 익신(益臣) 등 두 아들을 두었다.

  넷째형인 기남(奇男) 또한 후사가 없어 행적이 미상(未詳)하므로 생략(省略)했다.

 

9代祖 진사공 휘 민신(進士公 諱 敏臣)
1601~1659년(선조34년~효종10년);58세

  9대조이신 진사공(進士公) 휘(諱) 민신(敏臣)은 휘 태남(泰男)의 3자이며 자(字)는 자구(子求)요 호(號)는 시은(詩隱)이다.

  선조 34년(1601년)에 탄생하셨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학문을 좋아했다.

  공은 34세인 인조 13년(1635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당시 대학자인 정휴옹(鄭休翁) 홍익(弘益)을 스승으로 섬겨 학문에 정진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중에는 운암(雲岩) 이흥발(李興浡)과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등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참전(參戰)했다.

  청주(淸州)까지 진군 중에 굴욕적인 강화(講和) 소식을 듣고 통분을 금치 못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가지고 간 군량(軍糧)을 전주 희현당(希賢堂)에 보내어 군량(軍糧)으로 충당케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호남 창의록(倡義錄)에 기재되어 있다.

  공은 효종(孝宗) 10년(1659년)에 별세하니 향년 58세였다.

  묘소는 복내면 시천리 선고(先考) 묘 오른쪽 자좌(子坐)이고 배위(配位)는 숙인 성주이씨이며 합장이다.


 9대조 진사공(휘 敏臣)의 묘소<전남 보성군 복내면 시천리>

  공은 순조 7년(1807년)에 통훈대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공은 홍원(弘遠) 후원(厚遠) 중원(重遠) 항원(恒遠) 등 네 아들을 두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휘 태남(泰男) 휘 민신(敏臣) 부자(父子)분 때부터 우리 일가가 복내면 시래 당촌 등지에 터전을 잡고 세거(世居)하여 오늘에까지 이어 오고 있지 않았나 싶다.

  전해 내려온 이야기로 현재 시래의 휘 태남(泰男) 묘소는 원래 성주이씨 것인데 휘 민신(敏臣) 부인인 성주이씨가 친정아버지 묫자리에 물을 부어 못쓰게 한 후 다음에 시아버지(泰男)를 모셨다고 한다.

  여자란 출가외인이란 말이 있듯이 친정보다는 시부모 남편 자기 자식이 더 소중하다고 여기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친아버지 묫자리에 시아버지를 묘셔 가문을 빛내게 하려는 욕심이 아닌가 싶다.

  진사공의 큰형인 득신(得臣)은 자(字)가 자열(子悅)이며 선조 18년(1585년)에 출생하여 효종 8년(1657년)에 별세하니 향년 72세였다.

  기원(耆遠) 근원(謹遠)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진사공의 둘째형인 준신(儁臣)은 자(字)가 자호(子豪)이며 선조 31년(1598년)에 출생하여 인조 17년(1639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효종 8년(1657년)에 별세하니 향년 59세였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주원(柱遠)이다.

 

10代祖 좌승지공 휘 중원(左承旨公 諱 重遠)
1633~1689년(인조11년~숙종15년);56세

  10대조이신 좌승지공(左承旨公) 휘(諱) 중원(重遠)은 휘 민신(敏臣)의 3자이고 자(字)는 사임(士任)이며 인조(仁祖) 11년(1633년)에 탄생하셨다.

   공(公)은 용모가 준걸(俊傑)하고 천성이 관후(寬厚) 인자(仁慈)했으며 소년시절부터 지략(智略)이 비범했다.

  학문이 정박(精博)했으나 조정(朝廷)의 당쟁과 내우외환(內憂外患)의 난세를 개탄(慨嘆)하여 사환(仕宦) 진출을 사양하고 가업의 중흥(中興)과 자녀 훈육에 전념하셨다.

  현종(顯宗) 5년(1664년)에 조성면 대곡(大谷)에서 당촌으로 독립 분가 이거(移居)하여 가업을 닦고 경전(經傳)과 가례(家禮)에 전념하던 중 숙종(肅宗) 15년(1689년)에 별세하시니 향년 57세였다.

  배위(配位)는 전주유씨 문화유씨 하동정씨 세분이며 5남 1녀를 두셨는데 장자 한정(漢鼎;忠義尉 秉節校尉), 2자 한봉(漢封), 3자 한범(漢範), 4자 한언(漢彦;進士), 5자 한망(漢望;증가선대부 戶曹參判 겸同知義禁府事)이다.

  묘소는 처음에 당촌 당뫼에 안장하였다가 승주군 황전면 수평리 뒷산 우강사좌(右岡巳座)로 천장(遷葬)하였다.

  공은 순조(純祖) 7년(1807년)에 손자(孫子)인 이식(以栻;漢望子)의 가선대부(嘉善大夫)동지(同知) 중추부사(中樞府使) 벼슬로 인해 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좌승지(左承旨)겸 경연(經筵)참찬관(參贊官) 춘추관(春秋館)수찬관(修撰官)에 증직(贈職)되었다.

  상기(上記)한 바 좌승지공께서 1664년에 조성 대곡(한실)에서 처음 당촌으로 이거(移居)해 그 후손들이 살아온 지 어언 330여년이 되었다.

  공의 5자중 장자인 한정(漢鼎)을 제외하고 휘 한봉(漢封), 한범(漢範), 한언(漢彦), 한망(漢望) 네 분의 후손 대부분이 당촌에서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다.

  물론 판교(너덜이) 신기(새터) 겸어 강산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시대(時代)의 발전 변화에 따라 주민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진출해 감으로써 일가들이 번성했던 당촌이란 정서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당촌 등 내접산 인근 마을은 주암댐 건설로 대부분의 농토가 수몰 지역으로 들어감에 따라 타처로 이주해버린 것이다.

  수백년 동안 광이(廣李) 양반촌으로 이어온 제일 당촌(堂村)의 일가들은 광주로 서울로 뿔뿔이 떠나가고 명승(名勝)을 자랑하던 마을은 폐허(廢墟)가 되어버렸으니 가슴이 아플 따름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당촌을 지키고 있는 일가들이 남아 있고 비록 당촌을 떠나갔더라도 고향으로서 마음만은 항상 함께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좌승지공 중원(重遠) 유허비 건립

  당촌(堂村) 마을 입구에 좌승지공(左承旨公) 유허비(遺墟碑)가 지난 1993년 2월 25일 건립되었다.

  당촌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들이 좌승지공(左承旨公)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유허비 건립 추진위원회(위원장 永壎)를 구성하여 건립기금을 모아 이뤄진 것이다.

  특히 유허비 건립에 있어 필자의 백형(伯兄)과 중형(仲兄)께서 중추적인 소임을 맡아 이뤄진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갖게 한다.

  백형은 유허비문을 찬(撰)하셨고 중형은 비문을 서(書)하셨기 때문이다.

  여기 유허비 건립 취지문 일부와 유허비문 전문(全文)을 게재한 것은 두 형님의 업적도 함께 기리기 위해서이다.

 

유허비 건립 발기 취지문

  전약(前約)... 공(公)께서는 이립(而立;30세)에 대곡(大谷)에서 당촌(堂村)으로 이거(移居)하여 봉려(蓬廬)에 은거(隱居)하시면서 경전(經傳)과 가례(家禮)를 강마(講磨)하여 자녀질(子女姪)을 훈육(訓育)함에 엄정(嚴正)하고 처인온화(處人溫和)와 숭조(崇祖) 목족(睦族)으로 가업(家業)의 중흥(中興)에 전념하셨다.

  공께서 1689년 하세(下世)하신 후로 그 자손들이 위로 명현(名賢) 선조(先祖)의 학덕(學德)을 숭모(崇慕)하고 영재(英才) 교육(敎育)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당등(堂嶝)에 낙육재(樂育齋)와 천인정(千仞亭)을 건립하여 풍속(風俗) 영귀지소(詠歸之所)로 효우돈목지풍(孝友敦睦之風)을 현양(顯揚)하여 선조(先祖)의 무적(茂績)을 후세에 계승(繼承)하고자 하였으니 당촌(堂村)이야 말로 일수석(一水石) 일초목(一草木)에도 좌승지공의 장채(精采)를 입지 않은 것이 없으니 어찌 그 유허(遺墟)를 민멸(泯滅)하게 할 수 있겠는가.

  오호(嗚呼)라! 근심원달(根深源達)이라야 지무유장(枝茂流長)함은 불변의 진리(眞理)인지라 공의 적덕여음(積德餘蔭)이 영수내예(永垂來裔)하고 천보이 홍복(天報以弘福)으로 홍유석학(弘儒碩學)과 현관명사(顯官名士)가 다수 배출되고 창운(昌運)이 연면(連綿) 번성(繁盛)하여 그 수가 당촌에서 탑동 유동 평촌 판교 신기와 겸어(兼於) 강산(江山) 등 마을에 대 집성촌을 이루고 7백여호 3천여명에 달하였으나 세태 풍조와 산업 구조의 변천으로 이향(離鄕)하는 수가 점증하고 주암댐 건설에 따른 수몰로 인하여 대다수 종족(宗族)이 이산(離散)하여 장래 유허를 유수(留守)할 자 전무(全無)할까 우려하여 후대까지 영구불멸(永久不滅)로 기적(紀蹟)하기 위하여 촌전(村前)에 유허비를 건수(建竪)하기로 하였다.
 

 贈 通政大夫 左承旨 廣州李公 重遠 遺墟碑文

  山陽治之北 四十里 福內面 堂村마을은 앞으로 程子川이 浩浩湯湯히 흐르고 뒤로는 飛鳳山이 嵯峨聳立하였으니 鳳飛千仞之像의 勝地로서 山陽의 一堂村이요 道內 屈指의 名村으로 名人達士의 棲遲處로 名聲이 있는 곳이며 福城古縣의 治所로 社稷神을 모시는 神堂이 있어 堂村이라 由來하였다.

  元來 文氏 宋氏가 世居하였으나 廣州李公 重遠께서 移居 定着하신 곳이다.

  公의 始祖는 判典校寺事 贈左贊成 遁村 集이요. 寶城 入鄕祖 內贍寺判官 養眞齋 秀莞의 玄孫이며 考 成均進士 敏臣은 丙子亂에 擧義하여 贈司僕寺正이고 妣는 贈淑人 星州李氏 贈參判 珹의 女이시다.

  仁祖 癸酉 一六三三年에 顯官 碩學의 家門에서 誕生 天性이 寬厚仁慈하시고 操履가 堅確方正하시었으며 學問이 精博하여 處事에 詳明하시었고 待人接物에 謙恭愷悌하시고 容貌와 氣像이 端雅하여 和氣가 油然하되 그 凜凜함이 可히 侵犯하기 어려웠다.

  일찍이 黨爭과 禮訟 등 內憂外患의 亂世를 慷慨하여 仕宦進出을 辭하시고 顯宗 甲辰 一六六四年 而立에 大谷 舊第에서 堂村으로 移寓하여 蓬廬에 隱居, 經傳과 家禮를 講磨하시면서 治家에 費의 有無를 不問하고 雖至屢空이라도 不動心하시었다.

  家人僕隸가 或有失이라도 理로 譬說하고 不加怒言하였으며 子女姪의 訓育에 嚴正하시고 崇祖睦族으로 家業의 中興에 專念하시었다.

  肅宗 己巳 一六八九年에 下世하시니 享年 五十七歲이며 堂村 堂嶝에 安葬하였다가 昇州郡 黃田面 水坪村 右岡巳坐之原에 遷葬하였다.

  純祖 丁卯 一八O七年 孫 以栻의 貴로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에 追贈되었으며 配 贈淑夫人 全州柳氏 文化柳氏 河東鄭氏 三夫人에게서 生 五男하셨으니 長子 漢鼎은 忠義尉 秉節校尉요 二子 漢封 三子 漢範이요 四子 漢彦은 成均進士며 文學으로 著名하고 五子 漢望은 贈嘉善大夫 戶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이다. 孫 以栻은 學行으로 入道薦首望으로 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曾孫 廷璞은 登大科하여 司憲府執義를 行하였으며 後孫中에 鴻儒 碩學과 顯官 名士가 多數 輩出되어 昌運이 連綿하였다.

  또한 後孫들이 公의 遺訓을 遵守하여 堂嶝에 樂育齋와 千仞亭을 建立하여 學德을 崇慕하고 英材敎育에 置重하여 先祖의 茂績을 後世에 繼承하였으니 堂村이야말로 一水石 一草木에도 公의 精采를 不被한 것이 없으니 어찌 그 遺墟를 泯滅하게 할 수 있겠는가.

  嗚呼라 公께서는 坎하여 草茅에 居하면서 宦路를 멀리 하였으나 天報以弘福으로 子孫이 克昌하여 塔洞 柳洞 坪村 板橋 新基 兼於 江山 등 大集姓村을 이루고 其數는 七百戶 三千名에 達하였으나 世態風潮의 變遷으로 離鄕者 漸增하고 住岩댐 建設에 따른 水沒로 因하여 大多數 宗族이 離散하여 將來 遺墟를 留守할 者 全無할까 憂慮하여 후대까지 永久不滅로 紀蹟하기 爲하여 이 碑를 建竪하노라.

西紀 一九九三年 四月 十八日  

                                                      十八代孫   永  輝 撰

                                                                 永  壎 書

 

 

11代祖 휘 한봉(諱 漢封)
1669~1731년(현종10~영조7년);62세

  11代祖이신 휘 한봉(漢封)은 휘 중원(重遠)의 2자이며 자(字)는 차산(次山)이다.

  현종(顯宗) 10년(1669년)에 탄생하여 영조(英祖) 7년(1731년)에 별세(別世)하시니 향년 62세이다.

  배위(配位)는 나주정씨이며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흥(以興) 차남 이칭(以稱)이다.

  묘소는 시천(詩川;시래) 좌강(左岡) 간좌(艮坐)이다.


11대조 휘 漢封의 묘소<전남 보성군 복내면 시천리> 

  8대조(泰男) 9대조(敏臣)와 같은 곳에 있어 시제(時祭)도 한날에 모시고 있다.

 

12代祖 휘 이흥(諱 以興)
1700~1768년(숙종26~영조44년);68세

  12代祖이신 휘 이흥(以興)은 휘 한봉(漢封)의 장자(長子)이며 자(字)는 군복(君復)이다.

  숙종(肅宗) 26년(1700년)에 탄생하여 영조(英祖) 44년(1768년)에 별세(別世)하시니 향년(享年) 68세이다.

  배위(配位)와 자녀는 연일정씨 소생(所生) 5녀, 함양박씨 소생(所生) 2남2녀, 청풍김씨 소생(所生) 2남, 평택임씨 소생(所生) 2남2녀 등으로 배위(配位) 네분에서 6남 7녀를 두셨는데 장남 정각(廷珏), 2자 정박(廷璞;대과 급제), 3자 정침(廷琛), 4자 정완(廷玩), 5자 정황(廷璜), 6자 정곤(廷坤)이다.

  묘소는 내접산 묘좌(卯坐)이다.


 12대조 휘 以興의 묘소<전남 보성군 복내면 동교리 내접산>

  11代.12代祖께서는 관직(官職)에 진출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행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다만 족보 기록의 기본인 출생(出生). 별세(別世) 연대(年代)와 배위(配位), 자녀(子女) 그리고 묘소(墓所) 소재(所在) 등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두 분은 비록 벼슬은 못 했지만 웃대 대대(代代)로 고위(高位) 관직(官職)을 역임하셨기 때문에 명문(名門)의 후예(後裔)로서 대단한 행세(行勢)를 하면서 살지 않았나 싶다.

  휘 이흥(以興)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네 분이나 되고 자녀(子女)를 6남 7녀를 두었으며 묘소(墓所) 소재지(所在地)인 내접산이 우리 문중 산(山)인 것을 보더라도 당대(當代) 의 형세(形勢)를 알 수 있겠다.

 

13代祖 사간공 휘 정박(司諫公 諱 廷璞)
1754~1822년(영조30~순조22년);69세

  13代祖이신 사간공(司諫公) 휘(諱) 정박(廷璞)은 휘 이흥(以興)의 2자이며 자(字)는 광옥(光玉)이다.

  영조(英祖) 30년(1754년)에 탄생하셨다.

  공(公)은 용모가 수려(秀麗)하고 출중(出衆)하여 모든 사람의 선망(羨望)을 받았었다.

  학문에 정진하여 21세 때인 영조 50년(1775년) 8월 에 정시(庭試)로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공이 왕에게 숙배(肅拜)할 때 왕이 그 의용(儀容)의 출중(出衆)함을 보고 친히 손을 붓잡고 致賀하면서 시(詩) 일수(一首)와 규장운고(奎章韻考) 一部를 하사(下賜)하였다.

  왕이 시(詩) 일수(一首)를 하사하자 공이 성은(聖恩)에 보답하여 역시 시(詩) 일수(一首)를 왕에게 바치니 더욱 총애(寵愛)했다고 한다.

왕(영조)이 내린 시(詩)

八十一年逢此月  팔십일년에 이와 같은 달을 만났으니

追惟昔日懷千萬  옛날을 미뤄 생각하니 회포가 천만 번이구나

注;‘八十一年’은 왕의 나이가 81세이고 ‘이와 같은 달’은 公을 지칭하며 옛날 공과 같은 인재 등용을 생각하니 회포가 천만번 떠오른다는 것.

공(公)의 답시(答詩)

手攀丹桂高秋月  손으로 계수나무 높은 가을 달을 잡으니

拜獻瑤桃春萬萬  절하고 천도봉숭아를 드림에 봄이 만만 번이나 무르익더라

注;계수나무 높은 달을 잡은 것은 공이 대과에 급제하여 왕께 절하고 천도봉숭아(공의자신)를 드리니 봄이 만만번이나 무르익더라고 기쁨을 시사하고 있다.

  공은 동년(同年) 9월에 권지(權知) 정자(正字) 입한 주천(入翰注薦)을 제수(除授) 받았으나 다음해인 영조 52년(1776년)에 왕이 승하(昇遐)하니 크게 등용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

  정조(正祖) 6년(1782년) 육배(六拜) 경기전(慶基殿) 별검(別檢)에 올랐고 정조 9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거쳐 정조 13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정조 23년(1799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를 역임하셨다.

  순조(純祖) 2년(1802년) 다시 사헌부 지평 및 장령(掌令) 헌납(獻納)을 지냈으며, 순조 15년(1815년)에 사간(司諫)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셨다.

  그때 공의 나이 61세이니 40여 년간 공직에 계신 셈이다.

  공이 대과에 급제하여 40여 년간 조정에 있으면서 종3품인 사헌부(司憲府) 집의(集義)와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에 그친 것은 공이 청렴(淸廉) 정직(正直)하여 권세가에 줄을 대지 않았고 조정(朝廷)대신(大臣)의 배경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후 낙향하여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지내던 중 순조(純祖) 22년(1822년)에 별세하시니 향년 69세이다.

  왕은 공(公)의 부음을 듣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명(命)하였다.

  묘소는 문덕면 봉갑리 단양동 후강(後岡)에 있으며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해남윤씨이며 합장(合葬)이다.

  자 녀(子女)로 3남 4녀를 두었는데 장자 상대(象大) 2자 상휴(象休) 3자 상승(象升)이다.


 13대조 사간공(휘 廷璞)의 묘소<전남 보성군 문덕면 봉갑리 단양동>

 

14代祖 고조고 휘 상휴(高祖考 諱 象休)
1785~1846년(정조9~헌종12년);62세

  14대조이신 휘 상휴(象休)는 사간공(司諫公;휘廷璞)의 4남3녀 중의 2자이며 자(字)는 성용(聖容)이다.

  정조(正祖) 9년(1785년)에 탄생하셨다.

  족보(族譜)에 기록된 것을 보면 “早以文學 林下自樂 署其室曰 蓬萊閒居”라고 되어 있는데 그 뜻은 “일찍이 학문을 하고 사림에서 스스로 즐겁게 보내며 그 재실을 일러  봉래에서 한가히 보내다”로 풀이할 수 있겠다.

  이를 미루어 생각해 보면 관직에 계셨던 부친(사간공) 아래서 상당한 학문의 경지에 오를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셨고 비록 관직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학자(學者)로 처신하면서 여유롭게 보내시지 않았나 싶다.

  다만 부친(父親)인 사간(司諫)공이 21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60여세까지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하셨는데 가솔(家率)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다.

  한양에서 가족과 같이 살다가 벼슬을 마치고 내려 오셨는지 가족은 당촌에서 살고 공(公)만 한양에서 보내셨는지 기록이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헌종(憲宗) 12년(1846년) 12월 6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62세이다.

  배위(配位)는 죽산안씨이며 자녀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자 진악(鎭岳), 2자 진규(鎭圭), 3자 진명(鎭明), 4자 진민(鎭民)이다.

  묘소는 문덕면 봉갑리 동우동 자좌(子坐)이다.

  선고(先考)이신 사간(司諫) 할아버지 묘소 인근에 있어 시제(時祭)를 한날 같이 모시고 있다 14대조 휘 상휴(象休) 4자의 직계 종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장자 鎭岳 ― 基祐 ― 根會 ― 秉碩 ― 陽來 ― 容沃

        2자 鎭圭 ― 基璋 ― 三會 ― 永憲 ― 連植 ― 容相

        3자 鎭明 ― 基琠 ― 太會 ― 永輝 ― 謹植 ― 容勳

        4자 鎭民 ― 基奉 ― 斗會 ― 秉銀 ― 元植 ― 容宅

 

  내(필자) 어릴 적(40년대)엔 위 진(鎭) 자(字) 4형제 자손 집안과는 대소가로서 친근히 지냈었다.

  설 명절엔 세배를 위해 방문을 하게 되면 으레 술상이 나왔고 덕담을 나누며 화기애애하게 지냈던 기역이 생생하다.


  큰집은 석겻댁(秉碩), 둘쨋집 쌍촌댁(永憲), 봉동댁(奎會;광주로 이사감) , 우리집 품평댁, 넷째집 가동댁(斗會) 등이 대표적인 집안으로서 당촌에서 명성이 높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동란이란 민족의 비극이 그대로 우리 집안에도(당촌 일가 대부분) 불행으로 이어져 가세가 기울어지지 않았나 싶다.

  특히 좌익사상으로 유망(有望)한 젊은이들이 희생을 당했다.

 

15代祖 증조고 휘 진명(曾祖考 諱 鎭明)
1821~1871년(순조21~고종8년):51세

  증조고(曾祖考)이신 휘 진명(鎭明)은 휘 상휴(象休)의 4남3녀 중의 3남이며 자(字)는 사형(士炯)이다.

  1821년(純祖21년)에 탄생하여 1871년 (고종 8년) 1월 2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51세이다.

  증조비는 밀양박씨로서 1824년(순조24년)에 탄생하여 1895년(고종32년)에 별세하시니 향년 72세이다.

  증조고 보다 24년을 더 사셨다.

  선고(先考;太會)가 1884년생이니 선고 생전 13년에 할아버지가 별세하시고 선고 11세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셈이다.

  원래 증조고(曾祖考) 묘소는 복내 평촌(들말) 후록에 계셨고 증조고비(曾祖考妣) 묘소는 겸백면 자포실 사과공 묘각 후록에 계셨는데 1963년에 증조고비를 덜말 후록에 있는  증조고 묘와 합장했다.

  그후 2007년에 다시 묘소를 내접산 선고(先考) 조고(祖考) 묘소 위로 遷葬하면서 비석도 마련했다.

  아울러 금년(2009년)부터 증조고비(曾祖考妣)와 조고비(祖高妣) 형제(基琠.基玟)분을 時祭로 모시기로 했다.

  장손(長孫)이 5세손이 되었기 때문이다.

  증조고는 3남2녀를 두었는데 장자 기전(基琠) 2자 기민(基玟) 3자 기무(基珷)이다.


15대조(증조고) 휘 鎭明의 묘소<전남 보성군 복내면 동교리 내접산> 

 

16代祖 조고 휘 기전(祖考 諱 基琠)
1846~1886년(헌종12~고종23년):41세

  휘 기전(基琠) 조고(祖考)께서는 3남2녀 중 장자로서 자(字)는 여진(汝珍)이며 헌종(憲宗) 12년(1846년)에 탄생하셨다.

  족보(族譜)에 기록된 것을 보면 “孝友文藝見稱於士林”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뜻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학문과 예능이 뛰어나 사림에서 칭송했다.” 라고 풀이 할 수 있겠다.

  이를 미뤄볼 때 조고(祖考)께서는 윗대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학문에 정려(精勵)하면서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음을 알 수 있겠다.

  그러나 고종(高宗) 23년(1886)에 별세를 해 향년 41세로서 너무 빨리 돌아가셨다.

  조비(祖妣)는 여흥민(驪興閔)씨이며 1845년에 탄생하여 1898년에 별세하시니 향년 54세이다.

  조고께서는 딸 한분만 두고 아들이 없어 선고(先考;太會)가 계자(系子)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선고(先考;1884년생) 3세 때 조고(祖考)가 별세하고 15세 때 조비(祖妣)가 돌아가신 것이다.

  3세 때 양아버지가 별세하셨으니 얼굴도 기역 못할 나이이겠고 양어머니는 15세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친부모(基玟) 내외 두 분도 1907년 같은 해에 돌아가셨는데 그 때의 선고(先考) 나이가 23세였다.

  10대에 조실부모하고 20대에 친부모 모두를 잃으셨으니 그 고통(苦痛)이 얼마니 컸을까 싶다.

  아래로 두 동생(南會.昇會)들을 거느리고 가장으로서 살림을 이끌어가야만 했으니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나 싶다.

  조고(祖考) 묘소는 복내면 劒舞洞(거무골) 건좌(乾坐)에 있었는데 2003년에 내접산 간좌(艮坐)의 선고(先考) 묘소 바로 위로 옮겼다.


16대조(조고) 휘 基琠의 묘소<전남 보성군 복내면 동교리 내접산> 

 

16代祖 종조 휘 기민(從祖 諱 基玟)
1852~1907년(철종3~순종1년);56세

 

  휘 기민(基玟) 종조고는 휘 진명(鎭明)의 3남2녀 중 둘째 아들로서 자(字)는 군진(君珍)이며 1852년에 탄생하여 1907년 3월 9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56세이다.

 

  족보에 '孝友敦睦見稱於鄕黨'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효도하고 우애가 돈독 화목하여 마을에서 칭송을 받았다."라고 풀이 할 수 있는데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냈음을 알 수 있겠다.

 

  종조비는 성주이씨(1854~1907년)이며 3남을 두었는데 장자 휘 태회(太會), 2자 휘 남회(南會), 3자 승회(昇會)이다.

 

  장자인 휘 태회는 앞서 언급했듯이 백부(基琠) 앞으로 養子 가셨고 3자인 휘 승회(昇會)도 3종숙 뻘인 휘 기섭(基攝) 앞으로 양자를 가셨다.

 

  묘소는 합봉으로 겸백면 상덕음 연화동 노적봉에 계셨는데 복내면 내접산 선고(鎭明) 묘소 아래인 형(基琠) 묘소 옆으로 옮겼다.  

 


16대조(종조고) 휘 基玟의 묘소<내접산>

 

 

16代祖 종조 휘 기무(從祖 諱 基珷)
1864~1903년(고종1~1903년) ; 40세

 

  휘 기무(基珷) 종조고는 1864년 휘 진명(鎭明)의 3남2녀 중 막내 아들로 탄생하셨다.

 

  자(字)는 경진(卿珍)이다.

  1903년 3월 26일 향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셨다.

  종조비는 제주양씨이며 슬하에 1남 휘 양회(暘會)와 2녀를 두셨다.

  묘소는 합봉으로 이양면 어시동(御侍洞) 후록에 계시다가 2012년 4월 27일에 복내면 내접산 휘 진명(鎭明)선고 묘 아래로 옮겼다.

  기전(基琠),  기민(基玟) 두형과 나란히 계시게 되었으며 10월 시제(時祭) 도 같이 모신다.

 


 16대조(종조고) 휘 基珷의 묘소 <내접산>

 

17代 선고 휘 태회(先考 諱 太會)
1884~1971년;88세

  선고(先考) 휘 태회(太會)의 자(字)는 태일(泰一)이며 호(號)는 일촌(逸村)이다.

  호를 일촌(逸村;마을에서 편안히 지냄)으로 정(定)한 것은 일대조(一代祖)이신 휘 집(集)께서 둔촌(遁村;마을에서 은둔하며 살다)으로 정(定)한 것과 상통(相通)하다 하겠다.

  선고(先考)는 1884년 4월 4일 휘 기민(基玟)의 3남중 장자(長子)로 태어나셨는데 상기(上記)한 바와 같이 백부(伯父)인 휘 기전(基琠)께서 아들이 없어 장자계자(長子系子) 관례에 따라 큰댁에 양자(養子)로 들어가셨다.

  선고께선 어릴 때부터 영민(英敏)하고 글 배우기를 좋아하여 학자(學者)이신 생부(生父) 양부(養父) 슬하에서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하셨다.

  족보(族譜)에“博涉經史精通禮節鄕黨矜式焉”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뜻은 “경전(經傳;四書三經)과 사서(史書)를 널리 섭렵하고 예절(禮節)에 정통(精通)하여 향당(鄕黨고을)에서 모범이 되었다.” 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특히 선고께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정통하였으며 보학(譜學; 성씨의 내력)에도 조예(造詣)가 깊으셨다.

  유교(儒敎)인 공맹(孔孟)사상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하시고 서책(書冊)을 가까이 두며 학문에 정진하셨다.

  더욱이 평생 동안 문중사(門中事)에도 헌신하셨다.

  양진재공 문중 도유사를 수십 년 역임하시면서 족보 발간에도 힘 쓰셨다.

  1955년에 발간한 양진재(養眞齋)공 파보 중간(重刊) 서문(序文)을 지으셨고 1963년에 발간한 광원군 파보 서문도 쓰셨던 것이다.

  당시 한문학자로서 선고를 능가할 사람은 없었다.

  선고(先考)가 태어난 해인 1884년에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났고 10년 뒤인 1894년에는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淸日戰爭;일본승리)이 있었다.

  또 10년 뒤인 1904년(先考20세)엔 노일전쟁(露日戰爭;일본승리)과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당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었다.

  1910년엔 드디어 치욕(恥辱)의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이 체결되어 일제(日帝)의 강압(强壓)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때 선고(先考) 나이 26세로서 구한말(舊韓末)의 격변기(激變期)를 거쳐 일제(日帝) 시대가 시작될 때이다.

  선고(先考)께서는 화순군 이양면의 참판(參判)을 지낸 여흥민씨 계호(啓鎬) 여식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선고(先考)는 불행하게도 딸 하나만 생산하고 1915년 12월 16일 상처(喪妻)를 한다.

  그때 선비(先妣) 나이 32세였으며 세 살 난 딸을 두고 돌아가신 것이다.

  선고는 바로 다음해인 1916년에 벌교 평택임씨(平澤林氏) 휘 경모(涇模) 여식과 재혼(再婚)을 하고 1년 후인 1917년 6월 25일에 첫 아들(伯兄:永輝)을 보게 된다.
  이어서 1920년 4월 4일 둘째아들(永壎)을 낳는다.

  다음으로 셋째(永轍), 넷째(永鐘)와 1934년 2월 21일 다섯째(永培;필자), 1938년 1월 25일 여섯째(永根)를 끝으로 아들만 6형제를 두게 되었다.

  그때 선고(先考) 나이 54세이고 선비(先妣)는 40세였다.

  선고(先考) 52세 때인 1935년에 어느덧 18세로 성장한 장자(永輝)를 결혼시킨다.

  명문가(名門家)인 승주군 주암면 순창조씨 성모(聖模)의 여식을 첫 며느리로 맞이한 것이다.

  이어서 1938년에 18세가 된 둘째아들(永壎)도 화순군 도림 명문가인 죽산안씨 규덕(圭德)의 여식과 결혼을 시켜 두 번째 며느리를 맞았다.

  두 아들을 결혼시킨 다음해인 1939년(56세)에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발발한다.

  1943년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20세가 된 셋째아들(永轍)이 징병(徵兵)을 가게 되었다.

  장자(永輝) 역시 함경도로, 둘째(永壎)는 일본(日本)으로 각각 징용(徵用)을 가야만 했다.

  천만 다행으로 1945년 8월 15일 일본(日本)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종식되고 해방이 되었다.

  징용에 갔던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무사히 귀환(歸還)했지만 징병으로 나갔던 셋째아들은 불행하게도 전사(戰死)를 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선고(先考) 나이 62세로서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겪어야 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기초도 닦기 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그 한국전쟁이 일어날 무렵 넷째아들(永鐘)이 좌익 활동으로 인해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다가 불행하게도 죽임을 당했다.

  그때 선고(先考) 나이 66세로서 셋째아들(永轍)을 잃는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넷째아들(永鐘)을 잃게 되었다.

  결국 태평양전쟁에서 셋째아들이 징병(徵兵)에 갔다가 희생을 당했고 6.25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넷째아들이 좌익에 가담한 탓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선고(先考) 나이 70대의 노경(老境)에 셋째아들(永培)도 결혼을 시킨다.

  장흥군 용산 수원백씨 상인(尙寅)의 여식을 세 번째 며느리로 맞이한 것이다.

  이어서 넷째아들(永根)도 장가를 보내 보성읍 죽산안씨 종윤(鍾允)의 여식을 네 번째 며느리로 맞이했다.

선고의 진해 방문

  다음의 글은 1974년에 발행된 보성군향토사(寶城郡鄕土史)의 인물편 유림(儒林)란에 선고를 소개한 내용이다.

   【廣州李씨이며 자는 태일, 호는 일촌, 충희공 인손의 후손이다. 타고난 자태가 영민하고 걸출하여 문학을 일찍이 이루어 경서와 사기에 해박할 뿐만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이행할 만큼 독실하니 유학자들이 추앙하여 존중하였다. 아들로 영휘가 있고 복내 당촌에 살고있다.】
 

  아울러 1995년에 발행된 복내면향토지(福內面鄕土誌)의 인물편 유림·학행(儒林·學行)란에도 다음과 같이 소개 되어 있다.

  【광주인. (1884-1971), 자 태일(泰一), 호 일촌(逸村), 천성이 영매하여 문학이 일찍 성취되어 경서를 널리 통달하였으며 예문에 밝아 향리와 사림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자 영휘(永輝), 봉천리 거주.】

  선고(先考)는 자녀 4남 1녀와 손자 넷, 손녀 열넷을 두었는데 손자(孫子) 손녀(孫女)와 외손(外孫)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장남(永輝) 밑으로 1손자 4손녀를 두었는데 손자 근식(謹植), 손녀 경자(京子) 봉자(鳳子) 은자(銀子) 경희(京姬)이다.

  다음의 글은 복내면향토지(福內面鄕土誌)의 인물편 유림·학행(儒林·學行)란에 장남(永輝)을 소개한 글이다.

  【광주인. 1917년 봉천리 출생. 자 원실(元實), 호 남창(南窓), 희봉 안규용에게 사사하여 학문이 정통하여 경사를 널리 섭렵하고 향교 향사에 유공하여 사림이 추앙 칭송하다. 자 근식(謹植), 서울 거주】

  1983년 6월 양진재공파종회에서는 광주이씨세적(廣州李氏世蹟)이라는 책자를 발행했는데 장남(永輝)이 번역하기도 했다.

■ 차남(永壎) 밑으로는 1손자 5손녀로서 손자 창식(昌植). 손녀 형순(亨順) 옥란(玉蘭) 민자(敏子) 오남(五男) 명숙(明淑)이다.

■ 셋째(永培) 밑으로는 1손자 2손녀를 두었는데 손자 해식(海植 : 서울특별시 강동구청장), 손녀 해숙(海叔) 혜정(惠貞)이다.

■ 넷째(永根) 밑으로는 1손자 3손녀를 두었는데 손자 행철(行哲), 손녀 현주(賢珠) 현정(賢貞) 현진(賢珍)이다.

■ 장녀(賢淑)는 제주인 양재룡(梁在龍)의 子 회석(會錫)에게 출가시켰는데 3남3녀의 외손을 보았다.

  외손자로 찬승 형승 봉승이며 외손녀로는 점남 정애 규남이다.

  1960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경제개발과 새마을 운동을 펼치면서 3선 개헌으로 정권을 연장하고 이어서 유신시대에 들어설 무렵인 1971년 11월 22일 선고(先考)께선 향년 88세로 영면하셨다.

  선비(先妣)는 선고 가신지 18년을 더 사시다가 1989년 6월 27일 향년 91세로 별세하셨다.

  선고(先考)께선 5백년 조선 왕조가 망하고 구한말의 격변기에 태어나시어 일제(日帝)강점기의 태평양전쟁과 6.25의 한국전쟁 등 역사적인 가장 어려운 국란(國亂)을 겪으셨고 한국 경제개발이 한창일 때 돌아가신 것이다.

  선고(先考) 선비(先妣) 묘소는 내접산 간좌(艮坐)이며 합부(合)이다.


선고(先考)의 영정 사진


전남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당촌 천인정(千亭)


선고의 현판시
 

 此地端起此亭   이 곳 가장자리에 마땅한 정자가 지어 졌으니

 蒼茫眼界極長汀   아득한 시계 끝에 긴 강이 보이고

 逈跨野市人煙白   먼 들의 저자엔 사람들이 가득 차 연기처럼 하얗네

 雄壓羨祠鬼火靑   웅장하여 압도한 사당 문의 도깨비불이 푸르듯

 爽氣朝來山旣雨   시원한 기운이 아침부터 와 산이 온통 비에 젖었구나

 空光夜徹水多星   하늘의 풍경 밤에 밝아 물속에 별들이 많은데

 敎兒勿剪梧桐樹   아이들이 정자 앞의 오동을 베지 말도록 이르거라

 看得他時鳳鳥停   후일에 봉황의 머물음을 볼 수가 있으리


逸 村  李 太 會
 

 

17代 숙부 휘 남회(叔父 諱 南會)
1891~1946년 : 56세

  휘 남회(南會) 숙부께서는 1891년 11월 22일 휘 기민(基玟)의 3남중 차자로 탄생하셨다.

  자(字)는 상규(祥奎)이며 호(號)는 오헌(梧軒)이다.

  숙부께서는 상기(上記)한 바와 같이 큰 형(太會)이 백부 앞으로 양자를 가게 되어 부모를 계자로 모시게 되었다.

  형(太會)과 같이 한학자(漢學者)로서 특히 서예(書藝)에 능통(能通)하셨다. 그러나 지닌 학문을 크게 펴보지도 못하고 해방된 다음해인 1946년 3월 9일에 향년 56세로 너무 일찍 별세하셨다.

  숙모는 파주염(坡州廉)씨이며 1889년 8월 10일 생으로 몇세에 결혼했는지는 모르지만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며  1978년 9월 29일  별세하시니 향년 90세로 장수하셨다.

  묘소는 합봉으로 복내면 내접산 선영하록 간좌(艮坐)이다.

  자녀로는 장자 병림(秉琳) 2자 병백(秉栢) 3자 병직(秉職)이며 여식은 함양박씨(宗錫) 가문으로 출가했다.

장남(秉琳) 밑으로 3손자 1손녀를 두었는데 손자 홍식(鴻植), 경식(京植), 형식(亨植), 손녀 봉식(鳳植)이다. 

차남(秉栢) 밑으로 손녀 하나만 두었는데 광숙(光淑)이며 조카인 형식(亨植)이 양자로 들어갔다.

셋째(秉職) 밑으로 1손자 3손녀를 두었는데 손자 규식(奎植), 손녀 옥희(옥姬), 명희(明姬), 선희(善姬)이다.

장녀(玉禮)는 함양인 박종석(朴宗錫)에게 출가했는데 5남2녀로 외손자 해룡, 해웅, 해명, 해두, 해민이며, 외손녀 해선, 정희이다.  


숙부님의 현판시

 鳳去千年始有亭   봉황새 가버린 천년에 비로소 정자가 있으니
 
仰干碧落俯臨汀   푸른 하늘 쳐다보며 물가에 내려와 있구나
 
春來野水無邊白   봄이 오면 들판의 물은 가없이 하얗고
 
雲捲峰巒在下靑   구름 걷힌 산봉우리는 아래서부터 푸르다
 
夜壑松風驅驟雨   밤 골자기 솔 바람은 소나기를 몰고 오고
 
曉窓花露轉明星   새벽 창문 꽃의 이슬은 샛별에 굴러내린다 
 
德衰今日將何覽   도덕이 쇠퇴한 금일에 장차 무엇을 바라볼까?
 
愧煞行人往往停   행인들이 자주 멈추어서 쳐다봄에 매우 부끄럽다.

梧  村   李   南   會

 

 

17代 숙부 휘 승회(叔父 諱 昇會)
1893년~1952년 : 60세

  숙부 휘 승회(昇會)는 1893년 휘 기민(基玟)의 3남 중 막내아들로 탄생하셨다.

  자(字)는 치양(致陽)이며 상기(上記)한 바와 같이 3종숙 뻘인 휘 기섭(基攝) 앞으로 양자 가셨다.

  숙모는 두 분이었는데 첫째 숙모(제주 양씨)는 무후로 일찍(26세) 별세하셨고 다음 숙모는 영광김씨로서 2남(永吉.永模) 2녀(永點.永任)를 두었고 1943년 향년 41세로 별세하셨다.
  4남매가 10대(막내딸은 3세 때) 때 별세하셨으니 숙부님의 고초가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양모(養母:귀봉할머니)께서 1950년에 별세(숙모보다 7년 더 생존) 하셨으니 숙모님 사후 7년 동안 4남매를 돌본 샘이다.

  그러나 그 후 숙부께서는 네 자녀를 기르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더욱이  해방 이후 좌우익으로 대립된 혼란기에 장자(永吉)가 좌익 활동으로 가족들이 당국으로부터 혹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고 억울한 죽음을 당해 더 큰 고통과 불행을 겪으셨다.

  1952년 2월 2일 숙부께서는 가족을 뒤로하고 향년 60세로 별세하셨다.

  묘소는 복내면 내접산 선영하에 계신다. 

장남(永吉)밑으로는 손자 응식(應植) 한명을 두었고,

2남(永模) 밑으로는 2손자 1손녀를 두었는데 손자 동헌(東憲) , 동호(東浩). 손녀는 선경(善卿)이다.

장녀(永點)는 울산인 김병건(金炳建)을 부군으로 맞아 외손자 재옥,재평,재중.재율을 두었다.

2녀(永任)는 김해인 김도남(金道南)을 부군으로 맞아 외손자 종철, 종기, 외손녀 종련을 두었다.


숙부님의 현판시
 

 鳳山南畔是吾亭   봉산의 남쪽 두둑에 우리 정자가 있으니,
 
芳菲杜若汀   무성한 화초를 돌아서 당긴 향기로운 물가로다.
 
親戚話情樽酒白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두루미 술은 하얗고,
 
兒孫肆業簡編靑   자손들의 학업 연습에 책장은 푸르르다. 
 
秋砧野屋聲聲月   들녘 집의 가을 다듬이는 소리 소리마다 달을 부르고,
 
夜火漁村點點星   어촌의 밤 불빛 낱낱이 별이로다.
 
滿眼景光難寫盡   눈에 가득한 광경은 다 그려내기가 어려우니,
 
幾回濡筆幾回停   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가 몇번이나 그만 두엇던가? 

李     昇     會

 
 

17代 종숙 휘 양회(從叔 諱 暘會)
1886~1965년 : 80세

  종숙(從叔) 휘 양회(暘會)는 부(父) 휘 기무(基珷)의 1남2녀 중 외아들로 1886년에 탄생하여 1965년10월 10일에 향년 80세로 별세하셨다.

 

  자(字)는 양현(陽賢)이다.

  종숙모는 남평문씨로 1890년에 탄생하여 1965년 12월 18일에 별세했다.

 

  종숙보다 네살 아래이며 76세까지 살으셨는데 종숙과 같은해에 별세한 것이다.

 

  평균 수명이 짧은 그당시에 두분께서 80세. 76세까지 살으셨으니 천복을 누린 샘이다.

 

  뿐만아니라 2남 4녀를  두어 그 밑으로 손자 셋, 손녀 셋. 외손자 열둘, 외손녀 열둘  등 모두 30명의 손자 손녀를 두어 자손이 번창한 것이다.  

  묘소는 화순군 화순읍 새량리 촌후 이곡동 좌편 축좌이다.

  자녀로는 2남(秉珠.秉采) 4녀(順孝.二順.三順.閏心)를 두었다.

장남(秉珠) 밑으로 1손자 춘식(春植). 1손녀 순애(順愛)이다.

차남(秉采) 밑으로 2손자 2손녀를 두셨는데 손자 갑식 성식(甲植 成植), 손녀 미숙.문경(美淑.文京)이다.

장녀(順孝)는 광산인 정용규(鄭用奎)에 출가하여 1외손자(甲出) 1외손녀(甲愛)를 두었고,

차녀(二順)는 파평인 윤장호(尹章鎬)에 출가하여 3외손자(수만,길한,용한) 3외손녀(정임.영임.길임) 를 두었으며,

삼녀(三順)는 장흥인 마하출(馬河出)에 출가하여 5외손자(상진. 상수. 상복. 경윤.창진) 5외손녀(순임. 점순.순덕.임순.오순)를,

4녀(閏心)은 전주인 이승현(李昇鉉)에 출가하여 3외손자(춘호.필석.기상) 2외손녀(홍림.영숙)를 두셨다.
  


    
부        록

 

 

  팔극조정(八克朝廷)의 유래(由來)

  갑자사화(甲子士禍)

  대종회(大宗會)와 지파(支派)

  광주이씨(廣州李氏)의 관직(官職) 현황(現況)

  동고(東皐)와 한음(漢陰)

  족보(族譜)에 관하여

  진명파보(鎭明派譜)

 

팔극조정(八克朝廷)의 유래(由來)

  앞에서 시조 휘 당(唐) 할아버지로부터  1대조 휘 집(集) 둔촌공, 2대조 휘 지직(之直) 청백리공, 3대조 휘 인손(仁孫) 충희공, 4대조 휘 극돈(克墩) 광원군까지의 행적을 살펴 본 바 너무도 훌륭하신 선조들임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대과에 급제해 조정의 최고위직에 있었을 뿐 아니라 충의(忠義)와 학문(學問)이 뛰어난 분이셨다.

  8극(克) 조정이란 말은 세조~성종조 때 광주이씨의 극(克)자 항렬의 8종형제가 판서 정승의 반열에서 정무를 보면서 입.퇴궐했기 때문이다.

  우의정이신 충희공의 아들 5형제 극배(克培;영의정), 극감(克堪;형조판서), 극증(克增;판중추부사), 극돈(克墩;좌찬성), 극균(克均;좌의정)과 충희공 형인 장손(長孫;사인공)의 아들 극규(克圭;병조참의) 그리고 충희공 동생 예손(禮孫;관찰사공)의 두 아들 극기(克基;예.공조참판), 극견(克堅;좌통례) 등의 8인이 4촌간인 것이다.

  또한 이 8인은 청백리공 휘 지직(之直)의 손자이기도 하다. 재언 하거니와 1대조인 휘 집(둔촌공) 할아버지의 5형제와 세 아들, 일곱 손자, 증손자 여덟이 모두 등과해 고위 관직에 있음은 물론 수 십명의 현손들도 대과에 급제해 관직에 있었다.

  당시의 세조.성종조에 있어 광주이씨의 선조들께서는 종당숙질 등 20여명이 조정에 등청, 입퇴궐을 했다고 하니 그 성세를 가히 알만하다.

  용재총화(傭齋叢話)에 의하면 당시 대제학 성현(成俔)이  광주이씨에 대해 “당금문벌지성 광주이씨위최(當今門閥之盛 廣州李氏爲最)”라고 하여  당시 문벌중에 광주이씨가 최고라고 칭송한 것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

  우리 선조들은 팔극조정(八克朝廷)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화려했던 성세(聲勢)가 폭군(暴君) 연산조(燕山朝)에 이르러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인해 처참한 화난(禍難)을 당하여 한 때 기세가 꺾기기도 했다..

  연산군 10년(1504년) 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는데 그때 좌의정공(克均) 廣陽君(世佐;克堪의子) 숙질을 위시하여 우리 일문 30여명이 죽임을 당하였고 삼당척간(三堂戚間)에 모두 2백3명이 유배 등의 화난을 당했던 것이다.

  갑자사화란 연산군이 자기 생모 폐비 윤씨의 원수를 갚는다하여 일으킨 대옥사인데 연산군은 먼저 선왕(成宗)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와 정숙의를 대궐 뜰에서 타살하고 다음으로 춘추관에 명령하여 폐비 사약 시말(始末)단자(單子)를 작성하여 올리게 한 바 그 첫 번째 희생된 분이 광성군(克堪) 장자인 광양군(世佐)이고 폐비 사약 시말단자에 기록된 사람은 적극 찬동자는 물론 묵인한 자까지 화(禍)를 당했는데 그 수가 수백명에 달했다.

  당시 윤비에게 사약을 내릴 때 좌의정공(克均)은 의금부 도사였고 광양군(世佐)은 좌승지로서 숙질간에 직책상 사약 사발 봉송과 교지(敎旨) 봉송 책임자로서 처참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특히 광양군 아들 4형제가 모두 참형 당했는데 넷째인 수찬공(修撰公;守貞)의 둘째 아들이 조선조 최고의 명재상(名宰相)인 영의정 동고(東皐) 준경(浚慶)이시다.

  당시 동고공은 6세였는데 7세의 형 윤경(潤慶;병조판서)과 유모(乳母)를 따라 충청도 괴산 청안으로 유배(流配))됐었다.

  공은 2년 뒤(1506년)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와서는 외가(外家)에서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을 받아 큰 인물로 성장해 영의정까지 올랐고 그 후손들이 연이어 대과에 급제를 해 광주이씨의 명성은 되살아났다 하겠다.

 

대종회(大宗會)와 지파(支派)

  언제부터 각 지파종회로 구분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광주이씨가 1代祖인 둔촌공(遁村公) 이후 자손들이 파죽지세로 번창해 가다보니 여러 지파가 생기게 되고 그 지파 아래에서도 현달한 조상을 들어 oo파 oo공계 등으로 붙여 부르게 된 듯하다.

  그것은 각기 그 조상을 위해 그 후손들이 문중을 이루고 그 문중으로 하여금 기금을 마련해 그 기금으로 신도비(神道碑;종2품 이상)를 세우고 제각(祭閣)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는 숭조(崇祖) 정신을 기리고 문중의 단합과 친밀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현재 대종회 산하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있는 14개 지파종회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광주이씨 사인공(舍人公)파 종회

광주이씨 광릉부원군(光陵府院君)파 종회

광주이씨 문경공(文景公)파 종회

광주이씨 광천군(廣川君)파 종회

광주이씨 광원군(廣原君)파 종회

광주이씨 좌의정공(左議政公)파 종회

광주이씨 참판공(參判公)파 종회

광주이씨 좌통례공(左通禮公)파 종회

광주이씨 문숙공(文肅公)파 종회

광주이씨 목사공(牧使公)파 종회

광주이씨 십운공(十韻公)파 종회

광주이씨 율정공(栗亭公)파 종회

광주이씨 석탄공(石灘公)파 종회

광주이씨 엄탄공(嚴灘公)파 종회 등이다.

 

  지파종회를 분석해 보면 3대조인 휘 장손(長孫;사인공) 1자(극규)의 1개파와 역시 3대조인 휘 인손(仁孫;충희공) 5자(극배.극감.극증.극돈.극균)의 5개파, 역시 3대조인 휘 예손(禮孫;관찰사공) 2자(극기.극견)의  2개파 그리고 2대조인 휘 지강(之剛;문숙공) 1개파, 휘 지유(之柔;목사공) 1개파, 시조 휘 당(唐;생원공) 5자인 휘 자령(自齡;십운과공) 1개파 등 11개 지파는 시조인 휘 당(唐) 할아버지 후손이고 율정공(栗亭公;寬義), 석탄공(石灘公;養中), 엄탄공(嚴灘公;養蒙)지파 등 3개파는 시조(始祖) 휘 당(唐) 상대(上代)에서 갈린 것이다.

  고려말 당(唐) 할아버지 세대의 광주이씨 중에 학덕(學德)과 인품이 높은 관의(寬義), 양중(養中) 양몽(養蒙) 형제 등이 있었는데 그분들의 후손들이 광주이씨 대종회의 한 지파를 이루고 일가로서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모든 지파종회 안에서도 2,3대 더 내려가 각자 할아버지를 지칭하여 무슨 파 후손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광원군 아들 8형제 중 셋째인 휘 세정(世貞;감사공) 후손들이 감사공파 지파종회를 만들었고 또 그 감사공의 아들 5형제중 제일 막내인 휘 수관(秀莞;양진재공) 할아버지 후손들이 양진재공(養眞齋公)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 6대조인 양진재공이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보성(寶城)으로 낙남하여 터를 잡고 살아온 바 그 후손이 보성 광이(廣李)를 형성하게 되었기에 양진재공 후손임을 자부하고 있는 것이겠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관직(官職) 현황(現況)

  조선조에 있어 광주이씨로서 관직을 지내신분을 문헌을 통해 살펴 본 바에 의하면 문과 급제자만 1백86인이다.

  그중 정승반열에 계신분이 5인인데 인손(仁孫;우의정). 극배(克培;영의정), 극균(克均;좌의정), 준경(浚慶;영의정), 덕형(德馨;영의정)이시다.

  그 외에 혁혁한 사례로 문경공(文景公:仁孫2자) 이후 연10세 문과 급제와 좌통례공(左通禮公;禮孫2자) 이후 연4세 한림(翰林)이 있으며 문자시호(文字諡號) 받으신 분이 6인인데 문숙공(文肅公;之剛), 문경공(文景公;克堪), 문호공(文胡公:點), 문익공(文翼公;德馨), 문희공(文僖公;廷立), 문익공(文翼公;元禎)이다.

  그 외에 옥당(玉堂) 67인, 한림학사(翰林學士) 23인이다.

  조선조 5백19년간 우리 조상의 총 등과(登科) 수를 보면 2천3백47인인데 문과(文科) 1백86인, 무과(武科) 2백74인, 진사(進士) 2백42인, 음직(蔭職) 3백3인, 증직(贈職) 2백36인, 수직(壽職) 1백60인이다.

  문과 급제자 1백86인을 12개 지파(支派)종회 별로 보면

사인공(장손-극규)파 1인,

광릉부원군(인손-극배)파 16인

문경공(인손-극감)파 63인

광천군(인손-극증)파 6인

광원군(인손-극돈)파 16인

좌의정공(인손-극균)파 12인

참판공(예손-극기)파 1인

좌통례공(예손-극견)파 26인

목사공(지유)파 24인

석탄공(양중)파 9인

율정공(관의)파 2인

십운과공(백령)1인

소속 미확인 5인 등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 각 지파(支派)는 4대조 이상에서 분리되었는데 각기 지파 후손들의 번창함과 관직자 수에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청백리공 휘 지직(之直)의 여덟 손자인 지파만 보더라도 문경공파는 문과 급제자가 63인데 비하여 사인공 지파와 참판공 지파는 각각 1명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문과 급제를 많이 배출한 지파일수록 비례해서 자손들도 벌족하고 현세에 이르러서도 국회의원 장.차관 등 많은 고위 인재들이 배출돼 각계 요로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광원군파는 문과 급제에는 앞서지는 못하지만 그 번창함과 현세에 있어 어느 파에 못지 않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하겠다.

 

동고(東皐)와 한음(漢陰)

  동고 휘 준경(浚慶)과 한음 휘 덕형(德馨)은 영의정(領議政)으로서 조선왕조의 최고의 명재상(名宰相)이다.

  비록 직계(直系) 조상(祖上)은 아니지만 우리 광이(廣李) 중에 이 같은 훌륭한 인물이 있게 된 것을 보람과 긍지를 가지면서 그 두 분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두 분의 일생동안 그 많은 행적과 업적을 다 열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언제 출생하여 무슨 벼슬을 했고 당시의 조정에서 어떤 소임을 다했는지에 대해 간추려 말함으로써 두 분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 분께서는 일인지상(一人之上) 만인지하(萬人之下)의 영상(領相)을 여러 번 재임했지만 가정적으로는 두 분 다 불행한 상처를 안으셨다.

  동고(東皐)공께서는 6세의 어린 나이에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인해 조부(克堪)가 사사(賜死)되시고 부친 4형제는 참형을 당하셨다.

  한음(漢陰)공께서도 임진왜란 시 주상(宣祖)을 모시고 국란극복을 위한 몽진(蒙塵) 중이었는데, 부인(夫人)인 한산이씨가 친정인 강원도 안협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왜군이 안협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나자 여덟살 난 둘째아들(여벽)과 세 살 난 막내아들(여황)을 데리고 백암산에서 피신 중 왜군에게 몸을 더럽힐 것을 염려하여 바위에서 뛰어내려 순절했던 것이다. 당시 부인의 나이 28세였다.

  이와 같이 동고공께서는 유년시절에 갑자사화로, 한음공께서는 30대 초반에 임진왜란이란 국란으로 다 같이 가정의 크나큰 비극을 겪게 했던 것이다.

  그런 고초와 시련이 주석지신(柱石之臣;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신하)으로서 나라를 위해 큰 공적을 남기셨는지 모른다.

  동고공은 3대조이신 충희공(仁孫)의 현손(4대손)이고 문경공(克堪)의 증손이며, 광양군(廣陽君;世佐)의 손자이고 부수찬(副修撰;守貞)의 둘째 아들이다.

  한음공 역시 충희공의 6대손이고 좌의정공(克均)의 5대손이다.(고조;세준(世俊)-증조;수충(守忠)-조고;진경(振慶)-父;민성(民聖)이다.)

  따라서 동고공은 한음공의 대부 뻘 된다. 출생 연대로 볼 때 동고공이 한음공보다 62년 전에 탄생했다.

  동고공(東皐公)은 연산 5년(1499년)에 출생하여 중종 17년(1522년) 23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관직에 지출, 선조 5년(1572년) 74세로 별세하기까지 50여년간 중종. 인종. 명종. 선조의 4대 조정에서 수많은 관직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올랐으며 주상(主上)을 보필하며 오직 나라를 위해 헌신했었다.

  공(公)이 어릴 적에 갑자사화로 조부와 아버지 4형제가 참형(斬刑)을 당했다함은 앞에서 언급했거니와 그 때 7세의 형(潤慶)과 유모를 따라 충청도 괴산 청안으로 유배(流配) 갔다가 2년 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와서는 외가(外家)인 신판관댁(申判官宅)에서 어머니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 일재 이항(一齋 李恒) 등과 죽마고우(竹馬故友)로 유년기를 지냈으며 종형(從兄)이신 탄수(灘叟;延慶)선생에게서 수학하시며 조정암(趙靜庵;조광조)의 성리학(性理學)을 수강(受講)하셨다.

  공은 중종 17년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했고 중종 26년(153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부수찬 사경(司經)이 되었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에 피죄인(被罪人)의 무죄를 논했다하여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사 한 때 파직되었으나 1537년 김안로가 처형되고 나서 다시 복직되어 직제학(直提學) 대사성(大司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평안도 관찰사 병조판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다.

  병조판서 때 당대의 권력자였던 이기(李芑)의 뇌물 청탁을 거절, 윤임(尹任) 일파로 몰리면서 보은(報恩)으로 유배되었다. 1년 후 이기의 파직으로 사면되셨고 그 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함경도 순찰사를 지내고 1555년(명종10년)에는 전라도(全羅道) 도순찰사(都巡察使)로 호남지방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격퇴한 뒤 우찬성(右贊成)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67세인 1565년(명종20년)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셨다.

  공은 영의정이 된 2년 후 즉 명종 22년에 들어서면서 명종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항상 조정에서 침식하며 의대(衣帶)도 풀지 못하고 하명(下命)을 기다려야만 했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은 후 세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명종이 후사를 말하지 않고 죽게 되면 나라에 큰 혼란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공은 명종 승하(昇遐) 직전에 중전과 더불어 조정 대신을 불러들여 덕흥군(德興君;중종 7남)의 셋째아들로 대통(大統)을 잇도록 하니 이분이 바로 선조(宣祖)이며 위기를 잘 넘겼다.

  공은 원상(院相;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정사를 맡아 대비의 섭정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으로서 임금이 갖춰야할 일들을 자세하게 아뢴 바 외척(外戚)의 횡포를 제거할 것, 조광조(趙光祖)의 관직을 복권할 것,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을 등용(登用)할 것 등과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귀양간 억울한 인사들을 소환 복직시켜 줄 것을 건의했다.

  공은 선조(宣祖)가 즉위한 뒤 신진사류(新進士類)와 기존 사림 사이의 알력을 조정하다가 신진사류의 표적이 되면서 스스로 사임했다.

  공은 죽음을 앞두고 붕당(朋黨)정치의 대두를 예언하여 이이(李珥) 등 많은 사람들의 규탄을 받기도 했지만 얼마 뒤 공의 예언 대로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파당 정치가 시작되기도 했다

  공은 선조묘정(宣祖廟廷)에 배향(配享) 되었고 시호(諡號)는 충정(忠正)이며 저서로 동고유고(東皐遺稿)를 남기고 있다.

  한음공(漢陰公)은 명종 16년(1561년)에 출생하여 선조 11년(1578년) 18세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 광해군(光海君) 5년(1613년) 영의정에 있으면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處刑)과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론(廢妃論)을 반대하다가 벼슬이 삭탈돼 입조(入朝)한지 34년 만에 양평으로 귀향했는데 그해 10월 19일 신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3세였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8세 때에 이미 그 재명(才名)이 도성 안에 널리 퍼졌었다. 당대의 문장 대가로 알려진 양사언(楊士彦)이 그의 시재(詩才)를 시험 삼아 시를 짓게 했는데

野闊暮光薄

들이 넓으니 저녁 햇빛이 엷어지고

水明山影多

물이 맑으니 산 그림자가 많기도 하다.

  라고 지으니 그만 감탄하여 ‘너는 나의 상대가 아니라 스승이로다’라고 했다.

  공은 250여 편의 운문 한시와 수백편의 산문을 남겼다.

  국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국문시조 2편과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와의 문학적 교류를 하면서 사제곡(莎堤曲)을 비롯 조홍시가(早紅柿歌) 등을 짓게 하여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공은 선조 11년(1548년) 18세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19세에 복시(覆試)에 급제하였다.

  다음해 선조 13년에 정시(庭試)에 급제했다.

  당시 대제학(大提學) 이율곡(李栗谷)의 추천으로 호당(湖堂)에 뽑혔다.

  선조 18년 23세에 중시대과(重試大科)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승진되었다.

  그 후 직제학, 승지,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예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고 선조 24년 조선 왕조 역사상 최 연소인 31세에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선조 24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전국이 전란에 휩싸이고 나라는 존망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공은 주상을 모시고 몽진(蒙塵), 난국을 수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20만의 대군으로 쳐들어온 왜군들은 파죽지세로 북진해오면서 한편으로는 화의(和議)할 것을 제의해 왔다.

  이때에 공이 앞장서서 군사도 없이 홀로 적진에 들어가 왜사(倭使) 겐소와 담판, 그들의 명분 없는 침략을 준엄히 꾸짖기도 했다.

  또한 명나라에 청원사(請援使)로 가 지원군 파병을 성사시켜 당시의 불리했던 전세(戰勢)를 역전시키기도 했다.

  공은 7년 전쟁중 병조판서를 여러번 역임했으며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41세에 4도(道)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전쟁 후의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흩어진 군대의 재정비를 단행했다.

  이어 그 해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승진되었다.

  공은 임난 이래 공로가 많아 중국 사람이나 왜인들도 그의 성명(聲名)에 복종하였다.

  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았고 친한 사람이 없어 소인배들에게 곤혹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한음공은 유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과 더불어 임진왜란 극복의 주역으로 칭송(稱頌)받았다.

  전란 종식 후 선조는 공의 큰 공훈(功勳)을 치하 3개 훈봉(勳封)과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서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익공(文翼公)이다.

  유고(遺稿) 5권이 전해지고 있다.

 

족보(族譜)에 관하여

  족보(族譜)에는 대종회(大宗會) 차원의 광주이씨 전체를 아우르는 대동보(大同譜)가 있고 각 파(派) 별로 작성한 파보(派譜)가 있다.

  우리 광주이씨 최초의 대동보는 조선 명종(明宗) 때 동고(東皐;浚慶)공께서 편찬한 바 있으나 임진란(壬辰亂)으로 회신(灰燼)되었고 그 후 광해(光海) 庚戌年에 한음(漢陰;德馨)공이 교열 서문(序文)한 경술보(庚戌譜)가 가장 오래된 족보이다.

  그 후 경종(景宗) 때의 갑진보(甲辰譜;3권), 정조(正祖) 때의 병진보(丙辰譜;7권), 고종(高宗) 때 편찬한 계유보(癸酉譜;17권)와 그 다음 기미년(己未年;1919년)에 편수(編修)한 기미보(己未譜;21권)가 있는데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간행(刊行)된 오대보(五大譜)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후 가장 최근인 1987년에 14권의 대동보를 발간한 바 있다.

  1987년(丁卯) 12월에 발간(發刊)한 광주이씨 대동보(大同譜) 서문(序文) 첫 머리에
  "보서(譜書)란 한 씨족(氏族)의 역사이며 통서(統緖)를 실증하고 소목(昭穆)을 명확히 하며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후손으로 하여금 조선(祖先)의 유지(遺志)를 길이 본받아 상호친목(相互親睦)을 도모(圖謀)케 하는 문헌(文獻)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듯 족보는 씨성(氏姓)의 유래와 선덕(先德)을 추모(追慕)하고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미래(未來)의 희망과 아울러 친족(親族) 간의 화목(和睦)을 도모(圖謀)하는 데 참 목적이 있다 하겠다.

  한편 우리 파보를 살펴보면 광주이씨 광원군 파보와 광주이씨 양진재공파보가 있다.

  1963년(癸卯)에 광원군 파보가 발간되었는데 그 이후 46년이 되었다.

  대개 40여년이 지나면 그동안 자손들의 생사(生死) 산육(産育) 가취(嫁娶) 등 변동사항이 많아 재 수보(修補)를 한다.

  따라서 서울 광원군파 종회에서는 수년 전부터 광원군 파보 편찬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양진재공 파보는 1955년(乙未)에 발행한 바 있고 이어서 1979년에 발행한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선고(先考;휘 太會)께서는 1955년에 발행한 양진재공 파보 편수(編修)작업에 주도적인 소임을 맡아 전념하셨고 그 서문(序文)을 쓰셨다.

  또한 1979년에 발행한 양진재공 파보 편수작업에는 백형(永輝)께서 교정 업무 등 중추적인 소임을 맡아 하셨다.

  앞서 1963년에 발간한 광원군 파보 편수 제작에도 선고(先考)께서 직접 관여하셨으며 그 서문(序文) 역시 집필하셨다.

  그 두 서문은 1979년에 발행한 양진재공 파보에 게재(揭載)되어 있다. 

 

진명파보(鎭明派譜)

 


원본파일(HWP) 받기